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불이 본문
며칠 전 대학원 수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주의 강의주제를 다 다루고 “마지막으로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없냐”고 물으니, 나이 지긋한 한 원생이 “교수님은 오랫동안 행정학을 연구하고 교육하셨는데, 행정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어떻게 정의하실지 궁금하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해당 강의주제에서 다소 벗어난 예상 외의 질문이 훅 들어오니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학술개념 정의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고 보는 관점이 다르니, 뭐라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답변하기가 참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강의를 맡은 제가 오랫동안 행정학 교수로서 행정학이라는 한 우물을 파고 그 분야의 책도 적지 않게 썼으니, 대학원 공부를 하는 원생답게 뭔가 공부의 화두 같은 것을 얻길 기대하며 행정에 대한 탁견을 제게 물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은 제가 "역량에 비해 워낙 공부 욕심이 많고 그래서 연구대상이 다(多)초점적어서 행정학과 관련해 여러 주제를 다루다 보니, 넓게는 알지만 깊게 아는 것은 조금 부족하다"라고 이실직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래도 한가지 잘 아는 분야가 있다면 생태주의와 연관지어 행정학을 공부한 게 있다고 소개하면서, “행정을 한마디로 갈음하면 불이(不二)가 아니겠느냐”는 답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행정을 왜 불이로 보고 싶은지 짧게나마 제 생각을 전해보았습니다.
생태주의는 관계성과 전체론적 관점을 강조합니다. 즉 사람과 자연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즉 불이의 관점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자연을 사람의 서식처, 즉 삶의 터전으로 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자연을 자신들의 서식처로 보지 않고 자연 위에 군림하며 자연을 개발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분리적 관점과 도구적 자연관’을 가지다 보니, 기후위기, 생태위기 등 인간 서식처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숱한 자행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 [유마경]엔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연을 아프고 병들게 만드는 미친 개발, 막개발의 유혹에서 벗어나, 사람을 자연생태계의 일원으로 보는 좀더 겸허한 마음에서 병들고 지친 자연을 치유하고 돌보면서 서식처를 지속가능하게 지켜내려는 우리의 구체적 실천이 필요합니다.
자연이 아프면 결국 사람도 병들게 된다는 그런 불이의 관점을 지녀야 주된 행정행위인 개발행정에 따른 많은 무리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삶의 터전을 좀더 생태친화적으로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행정학에서 다루는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따로 떼어서 분리해 보거나 대립시켜 보기보다는, 서로 연결해 접점을 찾고 통합해서 볼 때 문제해결이 더 빨리, 더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간대학원 수업이 종료될 시점이지만, 내친김에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풀어보자는 생각을 몇마디 말로 더 보태 보았습니다 (이 글은 그날의 짧은 소견에 살을 좀더 붙인 것입니다) .
지금 시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큽니다. 하기야 시민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한 채 시민을 봉으로 보고 세금만 강요한 정부에게 잘못이 많습니다. 민주주의에선 시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규정하고 정부를 나라살림을 대행하는 대리인으로 설정합니다. 그런데 대리인이 주인의 뜻을 받들지 못하니 시민의 정부불신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긴 시간 동안 민주주의를 공부하면서 정부의 본질과 공무원 직업의 존재이유를 진지하게 사유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정부불신은 정부의 일부 종사자들이 자기 직업의 태생적 뿌리인 시민들을 우리-관계(we-relationship)가 아닌 그들-관계(they-relationship)로 보고, 시민의 생활문제를 ‘소 닭 보듯이 한’ 데서 기인합니다.
공무원이 자신의 직업을 노동의 대가를 전제로 하는 경제적 의미의 직업(occupation)으로만 보니, 공무원의 대리인 행동이 나라의 주인인 시민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핀트가 안 맞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 행정철학자 프레데릭슨은 공무원을 ‘대표시민’으로 정의합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지면서 나라의 주인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일반의지나 생활이익을 가장 잘 구현할 역량과 의지를 갖춘 사람들을 시민 중에서 선출, 임명해 정부에 포진시킨 나라살림 대행자가 공무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본인도 일차적으론 시민임을 자각하고 동료시민들의 생활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라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적극 행동할 때, 정부활동이 정당성을 얻고 시민의 지지를 더 얻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공무원과 시민이 그들-관계가 아닌 우리-관계여야 함을, 즉 양자가 불이(不二)의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나래를 좀더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방소멸 문제도 중앙과 지방의 불이 관계로 풀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중앙이 파쇼처럼 엄한 부모 입장에서 지방을 어린 자식 대하듯 하대하며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지시만 할게 아니라, 분가한 자식이 자생력을 키우도록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으로 응원하되, 정말 필요할 경우엔 꼭 나타나서 진정한 조력자 역할을 다할 때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앙의 지방소멸대응책을 보면 지원예산 몇 푼 쥐어주는 것을 구실로 지방을 통제하려는 측면이 안타깝게도 종종 드러납니다.
지방에 일거리가 없고 지방이 점점 '문화사막, 생활사막'이다 돼다 보니, 지역주민들, 특히 지방청년들이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중앙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방은 텅텅 비어 더욱 생활사막, 문화사막이 되어가고, 오아시스인 줄 알고 찾아간 서울을 비롯한 중앙의 수도권은 인구과밀에 따른 많은 문제들, 즉 주거난, 교통난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지방이 건재해야 중앙의 과밀 문제도 해결되고 중앙의 숨통도 트입니다. 결국 중앙과 지방이 서로 힘을 합쳐 지방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소멸대응의 핵심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들의 고유자원으로 자생적 지역발전을 강구하려는 지방(자식)의 자립역량과 더불어 중앙(부모)의 지역인지 감수성 제고와 슬기로운 조력자 역할이 요구됩니다. 이는 피붙이여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과 응원이 중앙-지방 간에도 똑같이 작용하고 시급히 요구된다는 점을, 즉 중앙과 지방이 불이의 관계임을 잘 말해줍니다.
야밤에 시행된 대학원 강의가 끝날 시간이니 교수나 진종일 직장일을 마치고 공부하러 온 원생들이나 다 녹초가 되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행정을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한 대학원생의 엉뚱한 질문이 정년을 앞둔 교수의 생각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지난 긴 세월의 공부흔적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잠시 갖게 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원생의 질문에 궁색하나마 답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랄까, 저도 모처럼 강의실에서 제자로부터의 질문에서 배운 것이 있어 일순 행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인 장석주는 “행복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찰나를 즐길 수 있는 역량”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 날 대학원 야간수업만큼은 정말 찰나적 행복이 컸다는 기억이 강하게 남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앉아 있는 대학원 강의실의 수업 분위기가 훨씬 진지해, 강의내용도 충실하고 강의의 밀도도 탄탄합니다.
일본 영화 [살아있는 모든 것]을 보면 불치병에 걸린 나이 든 환자가, 개인적 아픔에 겨워 실의에 빠진 젊은 의사에게 "사그라드는 촛불을 들여다보게나. 촛불도 살아나려고 마지막까지 저렇게 애쓰지 않냐”란 대사가 나옵니다. 만사에 의욕을 잃고 슬픔에 겨운 젊은 의사에게 나이 든 불치병 환자가 오히려 용기를 심어주는 영화 장면이 저 개인적으론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년을 코앞에 두고 자칫 안일에 빠지기 쉬운 저의 얄팍한 마음가짐을 성찰하며, “행정은 불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김에 저도 꺼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저 촛불처럼 마지막까지 연구와 강의에 더 몰입해 보자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여러 연유로 그날 밤 대학원 수업은 제 마음에서 쉬 지워지지 않고 오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