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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밤의 도시는 나무줄기 아치 속에 포근히 안기고, 낮의 도시는 넓은 밭을 지지대 삼아 힘차게 발돋음합니다. 자연은 도시의 부모 같습니다. 도시라는 자식의 힘겨움을 달래주는 넓은 품의 어머니 같고, 자식들이 더 높은 곳을 지향하도록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주는 속 깊은 아버지 같습니다. 도시 자식은 부모님 자연이 늘 곁에 있어 언제나 든든합니다.

이 세상엔 많은 길이 있지만 그 길이 다 이롭고 걸을만한 길은 아닙니다. 어떤 길은 한눈에 봐도 위협적이어서 범접하기 두렵고 어떤 길은 사람을 유혹하나 뭔가 꺼림칙해 진입이 망설여지는 길도 있습니다. 어떤 길은 반신반의하며 끝까지 가야만 하는 의심쩍은 길도 있습니다. 이 길은 두려움이나 의구심 따윈 다 잊고 마냥 서 있고 싶은 길입니다. 숲속처럼 자연이 충만한 길이며 종교가 다른 사람이 걸어도 모든 종교의 제일 덕목인 선한 마음을 익히는 길입니다. 오늘도 이 길 위에서 위를 향한 경건의 마음과 아래를 향한 겸허의 마음을 배워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누가 보든 말든, 누가 뭐라 하든 말든 나의 삶에 몰입하고 충실해 이만큼 몸을 키우고, 색을 다듬고, 향을 발하며 생애의 절정에 이르니 살아온 지난 세월에 후회 한 점 없습니다. 원 없이 삶에 충실했기에 여한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말없이 소멸해 갈 뿐입니다. 그 침묵의 퇴장은 아름다운 소멸입니다.

무더위에 힘겨워 찾는 이 뜸해진 성모마리아 상과 핸드폰의 위력에 눌려 이젠 찾는 이 없는 저 쓸쓸한 전화부스! 그래서 한여름의 이곳은 조금은 외롭고 슬픈 곳. 다행히도 여름을 탄생일로 하는 한 무더기의 꽃이 출현하니, 드디어 균형감 있는 삼각형 하나 완성! 역시 꽃은 어디서나 환영받는 영순위 손님! 외롭고 쓸쓸하던 이곳도 금새 화사하고 웃음꽃이 피는 곳으로 변신합니다. 꽃무리와 더불어 마리아상과 전화부스도 다시 태어납니다. 꽃과 함께 멋진 장소를 연출해내는 삼총사로 등장합니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전화부스가 저기 있고,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 반겨주는 꽃밭이 여기 있습니다. 행여 전화 걸 상대가 마땅치 않아도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여기 꽃들에게 말을 걸면 됩니다. 꽃들은 함박웃음으로 사람들 반기고 하늘하늘 몸짓하며 사람들 말에 호응합니다. 이곳은 소통과 만남의 장입니다. 언제나 말을 건넬 수 있는 곳입니다.

빗나간 마음 뉘우쳐 돌아오게 하려면 마음을 돌이키게 할 장소 하나 눈에 잘 띄어야겠죠. 그런 곳엔 빗자루 하나 놓여 있으면 금상첨화겠죠. 돌아온 지친 마음 누일 깨끗한 바닥도 만들어야 하지만 아직은 성긴 마음의 때 스스로 쓸어낼 필요도 있겠죠

혹독한 더위와 습기가 한물 가고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 부는 요즘입니다. 너무 덥고 습할 땐 하루하루가 살아내기 전쟁이고 참 힘겨웠는데요. 벌써 입추 지나고 이제 처서까지 지나니 시원한 초가을 바람이 열난 머리 식히고 더운 마음 다독입니다. 낮엔 햇볕으로 영글고 새벽엔 이슬 먹으며 저렇게 익어가는 과일을 보니 사람도 늦여름과 초가을의 교차 속에서 한층 익어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모든 길은 제각기 생겨난 이유가 있고 걷는 길로서 다 존재합니다. 오늘은 도시의 길, 내일은 시골 과수원길 두 길 모두 우리의 발길을 기다립니다. 어느 한쪽만 고집하기보다 두길 모두 찾아가야 합니다. 비록 몸은 늘 도시에 매어 있어도 고요한 시골길 하나쯤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젊었을 땐 길가의 의자가 눈에 잘 안 들어왔습니다. 언제나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어딘가를 향해 늘 달렸습니다. 나이든 이젠 길 위에 마냥 서 있는 것만이, 어디를 향해 늘 달려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가끔은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들어 하늘 보고 흐린 눈 씻어내며 숨 고르고 싶습니다. 길목에 의자가 있다면 기어이 쉬었다 가렵니다. 잠시라도 앉아 먼 산 지그시 응시하고 옆의 나무에 등 기대며, 쉼다운 쉼을 청해 보렵니다. 쉼이 있어야 삶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