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여행 (혹은 아들) 본문

일상 속의 글/두 글자의 사유

여행 (혹은 아들)

숲길지기 2011. 6. 10. 04:11

어제 모처럼 차를 몰고 멀리 다녀왔다. 최근 기름 값이 엄청 올라서 장거리 여행을 자제했었는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미국을 떠나기 전 다시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을 둘러보고 가자는 마음에서, 중부 및 남부 오레곤 코스트의 인상적인 장소들을 쭉 둘러보았다.

 

 

아침 일찍 간단히 샌드위치 4개, 사과, 쿠키와 커피, 핫 쵸코를 싸갖고 아들놈과 출발했다. 달리는 찻길엔 오월 말의 신록들이 우리를 마구 반겼고, 청명한 하늘 아래 파란 태평양 바다도 오랜만에 얼굴 본다고 반갑게 악수를 청해 왔다.

 

 

미국 와서 아들놈과 단둘이 여행할 기회가 많았다. 그전에도 중국의 오지인 실크로드와 캐나다의 로키산맥, 만주의 백두산 등을 아들놈과 여행했지만, 그땐 주로 패키지 여행이어서 여행계획을 손수 짜거나 여행 중 먹고 자는 문제에 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어린 아들놈과 동반한 여행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저 가이드 가는대로 부지런히 따라다니면 되었다.

 

 

이번 미국여행은 잠자리 예약, 먹을거리 준비, 장거리 운전, 차 정비 등등 많은 것을 내가 직접 해야만 가능한 장거리 운전 여행이다. 그래서 나 혼자서는 참 엄두가 안나, 몇 군데의 장거리 여행은 포기할 마음도 속으로 있었다.

 

 

그러나 아들놈이 호텔예약도 인터넷으로 도와주고, 달리는 차 안에서 지도 분석도 잘해주고, 여행길에서 부딪히는 많은 소소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통역사 노릇도 든든히 해주어 한결 내 고생이 줄어들었다.  아빠가 졸린 눈으로 밤길 운전하는 것이 걱정이 되는지 애써 졸린 눈 비비며 뒤 좌석에 앉아 말을 가끔 걸어오곤 해, 내가 졸음운전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팝송에도 조금 눈을 떠, 차 안에서의 뮤직 선곡자 노릇도 자처한다.

 

 

일전에 6개월 동안 미국 국립공원 여행을 했던 어느 노부부가 쓴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12인 몫의 여행 도우미(지도분석자, 영양사, 통역사, 말동무 등등----)로 은근히 칭찬하는 글을 읽으며 참 부러웠는데, 아들놈도 최소한 5-6인 몫의 여행 도우미 역할은 거뜬히 해낸 것 같다.

 

 

어느새 부쩍 커서, 아빠의 짐이 되긴커녕 장거리 운전여행의 도우미 노릇을 자처하고 또 성실하게 해내는 아들놈을 보며, 놈의 정신적 성장을 보게 해준 여행의 시간들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인데도 엄마와 떨어져 있어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아빠를 도와주는 든든한 새내기 청년으로 커가는 아들에게, 허약한 모습만 보이는 늙은 아빠가 되지 않도록 나를 담금질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

 

 

이제 2주 뒤면 아들놈 학교가 방학에 들어간다. 그러면 귀국하기 전 며칠간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우리 앞엔 미국에서의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듯이, 마지막 여행도 계획대로 잘 마무리해 한국에 무사히 돌아가고 싶다. 내가 한걸음 더 준비하고 한번 더 웃으면 아들놈도 더 잘 도와주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겠지. 아들놈의 성장을 다시금 확인하고 또 그놈의 성장의 디딤판이 되는 의미 있는 여행길이 되길 한껏 기대해 본다.

'일상 속의 글 > 두 글자의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전  (0) 2011.06.10
선물(혹은 댓글)  (0) 2011.06.10
미국  (0) 2011.06.10
산행  (0) 2011.06.10
PC  (0) 201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