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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생활가치를 정부의 정책가치로 전환시켜야 한다 본문

사람을 위한 제도와 정책/정책 평론: 사람을 위한 정책

시민의 생활가치를 정부의 정책가치로 전환시켜야 한다

숲길지기 2016. 2. 18. 18:04

그간엔 나라살림을 대신할 국정 대리인을 직접 뽑거나 임명해 책임정치와 책임행정을 해달라고 맡기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치행정의 주류를 이루어 왔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마치 사회일반의 공익(公益)인 것처럼 떠받들며,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일부의 형평성 조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공권력 사용의 합법성을 정부가 구현해야 할 기본 정책가치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행정국가의 폐해와 신자유주의 정부개혁의 한계 속에서 기존 정책가치들의 시대적 적실성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의 힘과 덩치는 날로 커지고 통치비용은 늘어만 갔지만, 정부의 일 속도는 느려 터지고 문제해결력은 저하되었습니다.  미셀 푸코의 지적처럼, 정부는 종종 규율권력을 내세우며 시민들로 하여금 규율과 복종의 질서를 내면화하도록 훈육해 권력이 다루기 좋은 균질적, 복종적 인간을 만드는 반 민주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행정국가 하에서 정부의 무능과 비효율이 극에 이르자 그 치유책으로서 시장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며 시장 철학과 시장원리가 전격 도입되었고, 정부는 한동안 시장 따라하기에 바빴습니다. 

 

가장 서민적으로 보인 대통령조차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개탄했고,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집권했습니다. 정부의 시장 따라하기가 당대를 가장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원리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효율을 앞세워 사람들을 무한경쟁시킨 뒤 그들을 비인간적인 잣대로 함부로 재단해 단기적 성과 순으로 줄 세웠습니니다. 사람들을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 자본의 이익에 꼼짝 못하도록 순종적 인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공공부문의 개혁에 시장 가치가 이식되며 무한경쟁 등 각자도생과 성과효율이 지배적 가치가 되었지만, 신자유주의식 대량 정리해고가 낳은 아메리카 카우보이 자본주의가 끝을 모르는 고용불안을 조장한 결과, 조직 민주주의의 후퇴 속에 순응적 조직인들만 양산되었고, 사회경제적 주체인 시민과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서 타자화, 대상화되면서, 그나마 대의제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공공성 부재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의 자식들이 애타게 바다 속에서 죽어가는데 국정 대리인들이 허둥지둥대며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본 세월호 참사가 바로 그 아픈 현실을 웅변합니다. 이처럼 정부의 문제해결력은 의문에 쌓인 채 관피아의 적폐만 쌓여갔습니다. 

 

규율과 질서, 경쟁과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시민들의 생각과 행동을 획일적으로 표준화하고 체제의 가치에 맞게 길들이고 훈육하는 권력의 횡포와 돈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이념의 강세 속에서 체제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도전은 매우 부족한 현실입니다.

 

젊은이들조차 고용불안에 떨며 직업 안정성이 높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각자도생을 도모하면서, 청년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연대(solidarity) 전략은 그만큼 후퇴합니다.

 

그 결과 승자독식주의에 따라 배분적 정의는 물 건너가고 형평성 가치는 약화되었습니다. 특히 로펌 등 자본의 법 구매력에 따라 유전무죄가 일상화되면서, 부와 권력의 치졸함을 법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 합법성 가치는 전락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우리 사회에선 가장 사(私)적인 사람들이 돈과 권력에 힘입어 공(公)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부패와 부정의가 만연하고 있고, 따라서 이런 잘못된 공의 질서에 대해 정당성 의문이 크게 제기됩니다.  

 

대의제 하에서 선거일 하루만 시민들이 사람 대접받게 하고 나머지 긴 기간 동안은 줄곧 선거제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형식적 선거 민주주의, 돈과 권력에 약한 법치주의, 효율 지상주의 등 그간 정부가 추구해온 정책가치들은, 시민들의 아픈 현실을 외면한 채 그저 위로부터 주어지는 껍데기 가치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우려가 큽니다.

 

시민 삶의 아픈 현실을 극복하는 데 적실성을 갖는 대안적 가치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먼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오로지 살 길은 공생, 협력, 연대의 가치임이 대안적 가치의 모색에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공생과 연대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공(公) 만들기, 즉 함께 더불어 하는 공(共)에서 공(公)의 정당한 질서를 찾아내야 합니다.

 

같이 서고 더불어 살려는(共) 마음가짐으로부터 진정한 공(公)의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갑과 을의 나라도 없어집니다. 힘겨운 모두가 갑으로 존중받고 그렇기 위해 여유로운 사람들이 스스로 낮은 데로 임해 을의 책무를 다하는 새로운 노블리스 오브리쥬의 멋진 사회도 만들어집니다.

 

둘째, 대의제 하에서 선거 당일만 사람 대접받게 하고 나머지 긴 기간 동안은 줄곧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 형식적 선거 민주주의보다는 시민들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한 힘을 스스로 기르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자생력, 자율과 자립의 가치가 요구됩니다.

 

신자유주의식 정부개혁을 맹종해 공공성 부재의 위기를 자초한 일부 고위관료들과 정치인에게만 국가운영을 맡길 것이 아니라, 해방적 관심에 의거한 시민 주도적 사회변화를 촉진해야 합니다. 

 

민들이 나라의 주인답게 정치행정의 새 틀을 짜는 주체로 다시 나서게 하는 제도적 공간도 필요합니다. 대의제 하에서의 단순 투표자가 아니라 정책과정에의 적극적 참여와 숙의를 통해 공공사를 공동으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정치의 주체로 되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셋째, 헬 조선, 지옥 불반도, 흑수저 등 젊은이들이 환경 탓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실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생활가치들을 생활현장에서 찾아내 그것을 정부가 추구해야 할 핵심 정책가치로 전환시키도록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정부는 시민의 역할기대인 생활가치들의 정책 가치화를 도모해, 정부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바 그 속에서 정부의 존재이유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정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은 시민 모두가 나라살림에 관여하기 곤란해 동료 시민들에 의해 국정 대행자로 고용된 대표시민라는 자기 직업의 태생적 뿌리와, 시민-정부 간 관계가 남남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관계'라는 인식에 터해, 공적 자아로서의 역할 정체성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동료시민들이 정책과정에서 대상화되는 것을 막고 시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는 역지감지를 통해 시민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합니다.

 

정부가 시민의 생활가치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역할공간을 체득할 때, 정부의 업무는 더 이상 소관과 관할을 따지는 핑퐁행정이 아니라 시민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필히 돌봐주어야 할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

 

그럴 때 정부는 사랑의 대상인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시민과 머리를 맞대며 숙의하고 토의를 거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미 있는 정책설계에 올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의제를 극복한 시민 주도적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나라살림에 공생과 연대의 가치를 제도화해 나가는 참여 민주주의, 숙의(熟議)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또 자율의 가치 아래 시민이 정책과정에 적극 참여해 정책방향을 공동으로 주도하고 그런 아래로부터의 공적 질서 찾기가 정부 정당성의 진정한 원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시민생활현장에서의 실제 생활가치들이 정부의 정책가치로 자리 잡으며 고용불안과 민생고 등 열악한 환경 극복의 실제동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정부가 시민들 곁으로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나아가 시민의 일반이익과 완전 합체되기 위해 시민들 마음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국정 대행자답게 나라살림에 최선을 다할 때, 시민 속의 정부, 우리들의 정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시민 속의 정부만이 비로소 사람을 위한 정책들을 입안해 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