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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글/두 글자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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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지기 2011. 6. 10. 03:44

어느 사회나 근대화 과정에 진입하면 집단에서 개인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 특히 집단주의 문화유산의 병폐가 컸던 전통사회에서 막 벗어나 근대적 인간상(像) 아래 근대화(modernization)를 발전의 당위 명제로 삼는 과도기 사회로 진입할수록, 사람들은 만병의 근원으로 여기던 집단주의 요소를 단칼에 버리고, 개인적 합리성과 세련된 개인주의 행동규범 등을 선진국 문화인 것으로 해석해 무조건 수용한다. 그런 개인적 합리성의 추구를 촉진키시고 개인주의 행동규범을 가시화시키는 도구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컴퓨터를 예로 들어 말해 보겠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구센서스 조사에서나 써먹던 대형 컴퓨터가 사라지고, 개개인이 정보를 구하거나 문서작업을 위해 혼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PC) 시대가 우리사회에 등장한지도 벌써 수십 여년이 지나간 것 같다.

 

연구년을 맞아 나도 미국에 오면서 조그만 넷북 컴퓨터를 하나 더 장만해 왔다. 장소의 구애됨 없이 아무 곳에서나 글 쓰고 자료 찾고 하기 위해서 초 경량급 PC를 매일 배낭에 넣고 이곳저곳에 걸어 다닌다. 인터넷이 되는 PC를 하나 등에 매고 다님으로써, “움직이는 오피스”가 하나 마련된 것이다.

 

사람들은 PC를 통해 이처럼 공간적 구속성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아무 곳 아무 때나 PC를 통해 월드 와이드 웹(www)의 세계에 접속함으로써 시간의 장애도 극복했다.

 

과거엔 집단 속에 있음으로써, 우리가 시공(時空)의 제약을 줄일 수 있었다. 집단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공공조직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이 특히 약했던 우리의 전통사회에선, 1차집단이 든든한 사회보험장치였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PC를 하나 손에 넣음으로써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시공의 제약을 극복했고, 그 덕분에 집단에서 개인으로 완전히 연착륙(?)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집단에서 개인으로의 삶을 가능하게 한 생활 인프라인 PC가 최근에는 다시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가치를 도모하는 쪽으로, 특히 개인들이 어떤 공공성을 만들고 그 속에 자신을 다시 진입시키는 장치로 재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나는 하루에 개인용 이메일, 한국의 학교 이메일, 이곳 연구년 와 있는 미국 대학의 이메일 등 3종류의 이메일을 하루에 1번씩 체크한다. 물론 업무용, 사회생활용 이메일 검사이지만, 그 이면엔 남을 가려서 만나고 웬만한 일엔 잘 관여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 나라는 사람조차도, 이메일이란 수단을 통해 집단의 운영기제 속으로 들어가 남들과 같이 무엇을 공유하고 그 공유의 대상을 더 확대하기 위해 남들과 굳이 접속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 운영하는데, 이것 역시 나라는 개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를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굳이 남에게 소개하고 그것을 그들과 공유하기 위해, 더 나아가선 그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한 나의 의도적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메일이나 블로그나 다 PC를 매개로 해 이루어지는 집단 내 소통방식이라면, PC는 다시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지향성을 말해주는 새로운 징표가 될 수 있다.

 

우리사회는 유교문화의 폐해가 커서 근대화 초입에서부터 과거의 것들을 다 용도폐기 처분해 버렸다. 그 용도폐기 과정에서 정말 버려선 안 되는 좋은 전통과 선조들의 지혜자본마저 마구 부정해 버린 점은 너무 안타깝다.  선조들은 향약을 만들고 두레를 만들어 서로 공생, 협력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선조들의 이런 지혜자본, 사회자본을 현대적으로 가용(可用)해, 지나치게 개인화를 추구하는 오늘의 무한경쟁식 삶의 방식이 노정시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가치기제나 소통기제를 생성하고 제도화시키는 일 것이다.

 

PC는 그런 집단적 소통방식을 생성하고 제도화하는 데 좋은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선조들의 두레, 향약이 오프 라인에서의 집단적 가치의 실천이었다면, 우리는 PC를 통해 온 라인 상에서 집단적 가치기제를 모색, 설계할 수 있다. 또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마다하지 않고 집단의 지혜자본을 모으기 위해 여러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집단주의 병폐를 버리고 개인의 근대성을 돕던 PC란 놈이, 다시 우리로 하여금 개인을 떠나 집단적 가치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툴(tool)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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