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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국가: 노동희소사회, 알바공화국을 위해 (우석훈 , 레디앙, 2024) 본문

일상 속의 글/대안적 발전 책 소개

천만국가: 노동희소사회, 알바공화국을 위해 (우석훈 , 레디앙, 2024)

숲길지기 2025. 4. 11. 17:56

동네 길에서 아기들을 만나면 참 반갑습니다.   내 피붙이가 아닌 남의 집 아기이지만, 아기들의 웃는 얼굴이 참 귀엽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대견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오는 아기들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 한해에 태어나는 신생아수가 20만명에 불과합니다. 합계출산율이 0.7로 떨어지면서 저출산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저출산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지방소멸 등 많은 문제가 이미 우리의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압축성장, 압축민주화까진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아었는데,  압축인구, 즉 저출산 초고령 속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은 자랑보다는 큰 걱정거리로 다가옵니다.

 

급속도로 전개되는 인구절벽 현상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국가소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그냥 방치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붕괴마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평균수명 100세에서 한해 출생아수가 10만명 남짓으로 줄면 20-30년 후 인구 '천만국가'의 도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어두운 전망을 내립니다.

 

한때 북유럽처럼 작지만 강한 나라, 즉 강소국을 모델로 삼아 국가정책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눈을 팔며 저출산에 대한 마땅한 대응책을 조속히 마련하지 못할 때 예견되는 천만국가 상태에서는  "강소국이 아니라  그냥 작은 국가가 되고 만다는 저자의 슬픈 전망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신분과 자산의 세습이 강고해지는 '상속자의 나라'에선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은 '부모의 경쟁력이 곧 자식의 경쟁력'인 왜곡된 능력주의 하의 피말리는 경쟁에서 늘 참패하고 승자독식사회의 희생양으로 겨우 잔존하기 쉽습니다.

 

냉혹한 신자유주의의 현실은 취업 등 시장진입 장벽을 드높게 하고 청년들로 하여금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결혼, 출산, 양육의 꿈을 접게 만듭니다.

 

저자는 청년들이 어렵게 결혼, 출산해도  "노키즈 존, 촉법소년 연령 인하가 노키드 국가"를 고착화시킬 것을 걱정합니다(물론 아기들이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지키고 남에게 방해가 안되도록 부모들이 가정에서 기초질서교육을 단단히 맡아줄 필요는 있습니다).

 

저자는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오늘의 현실이 21세기의 병든 한국문명"이라고 질타합니다아마도 열악한 임금수준과 비정규직 등 극도로 안좋은 노동환경, 그리고 중대재해처벌법의 형식적 적용 등이 그 예증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이 보장되지 않고 자산상속을 기대할 수 없는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은 합리적 선택이 되기 어렵습니다.

 

지방으로 갈수록 산부인과는 사라지고 장례식장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치원이 양로원으로 건물용도 변경하기도 쉬운" 사회입니다그 모든 결과는 "국토 절반을  육아사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책엔 지역에 아이들이 사라지면 "유치원이 줄고 폐교가 늘며, 그러면 학교 인근의 문방구, 분식집, 떡볶이집이 문을 닫고 인근 도서관, 병원도 문을 닫는 등  출산 육아 클러스터의 도미노 붕괴"를 우려합니다.

 

밑을 받쳐줄 후세대 인구가 줄어들면 연금 등 세대간 도덕공동체의식에서 출발하는 국가제도의 근간도 뒤흔들립니다.

 

인구가 줄면 결국엔 '노동희소사회'가 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는 쉽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인구청을 설치해 이민노동을 권장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럽의 경우 자본과 인구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쉥겐협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 취업이민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외국노동자들을 쉽게 쓰고 함부로 버리는 비인간적 제도로 이미 악명이 높아 이주노동, 취업이민의 물결을 낙관하기 어렵게 합니다.

 

흔히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란 말이 있는데, 저자는 저출산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라고 봅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저출산 초고령에 따른 천만국가 도래는 우리 모두가 직면할 문제이지만 아무도 당사자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식을 다 출가시킨 노장층은 더 이상 저출산 현실을 자기 집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최근엔 모아둔 돈을  '이 생에서 다 쓰고 죽겠다'고 한풀이식 소비지향을 자랑스럽게 공언합니다. 이에 대해 N포 세대 청년들은 '노 결혼, 노 출산 선언'으로 대응합니다.

 

저자는 나이 들어 뒤늦게 아이를 얻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두 어린이를 육아하며 절실히 느끼고 대책을 강구하는 '당사자주의 입장'에서 책을 써서인지 저자의 현실진단이 피부로 체감되고 설득력도 큽니다.

 

이 책에선 "출산, 보육,육아 시설의 국가기반시설화, 지역필수시설화"를 강조합니다. 이런 시설이 토건형 SOC만큼 중시될 때 인구절벽, 지방소멸의 문제를 풀 실마리를 겨우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상속자의 나라가 아니라  알바들이 행복하고 걱정 없이 출산하는 사회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이를 위해선 생활임금의 적정수준 책정과 주거 공간의 질이 제도화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출산,육아 생태계의 제도화가 긴요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중산층도 사교육의 부담에 허리가 휘어지는" 지금, 우리 모두는 각자도생하려 합니다. 하지만 사교육 등 각자도생의 몸부림은 각자도사라는 공멸의 수순을 밟기 쉽습니다. 노동자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큰 공정의 틀을 갖추고 출발선에 균등하게 서게 하는 기초복지의 내실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저자는 "앞에서 5등이 아니라 뒤에서 5등인 학생들에게 눈길 주기"도 당부합니다. 그들이 국영수 과목을 원하지 않으면 국영수 말고 바리스타나 플로리스트 양성 등 맞춤형 교육이 필요하단 것입니다.

 

이 책은 '새로운 한국문명의 에토스'를 강조하는데, 책을 읽으며 제가 생각해본 바로는 신분세습적 차별 없이 모두가 각자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큰 공정틀을 만들고,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출산육아 생태계의 조성, 기회균등의 복지 및 교육의 제도화 등 새로운 문명적 전환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출산문제를 대한민국 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고 출산 육아의 인프라 조성에 모두가 정책적 지지와 세금 등 당연지불의사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길에서 본 아기들을 귀여운 눈으로 쳐다보는 동네어른들에 대해 일부 젊은 부모님들도 행여나 유괴범 대하듯 하는 매서운 경계의 눈초리는 좀 거두어들였으면 합니다. 그저 아기가 귀엽고 대견해 쳐다볼 뿐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마을 전체의 관심으로 봐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고 모두의 삶과 꿈을 존중해주는 새로운 사회로 갈 때, 또 세대간 도덕공동체 의식 아래 후세대를 내 자식처럼 정성껏 키우는 데 다같이 힘을 모을 때, 인구절벽 속도를 늦추며 천만국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