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본문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오랫동안 자연에 의존해 왔습니다.
환경사회학자 Dunlap은 이런 점에서 자연환경의 3가지 기능으로 삶의 공간, 자원공급창고, 폐기물저장소 기능을 듭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한성장과 개발이익의 유혹에 흠뻑 빠져, 삶의 터전인 생명의 장소에서 자원의 과도한 철회(추출)와 폐기물의 지나친 첨가행위를 줄곧 반복해온 점입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무한대의 이윤추구를 위해 구축된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이 자연자원의 지나친 추출(철회)을 조장하고 생태적 수용능력을 훌쩍 넘어선 산업,생활 폐기물의 첨가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깨면서 상상을 초월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잉태했지만, 그 끝없는 욕망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 개발의 대상으로 한없이 전락시키고 병들게 하는 엄청난 탐욕구조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류문명 발전사는 지구 생태계 파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녹색 댐, 녹색 방음벽, 에너지 보물창고, 그린 SOC 등등 숲으로 표징되는 자연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듬뿍 주어왔습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다친 사람들은 산이나 바다, 숲을 찾으며 심신을 치유해 왔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종합병원이었습니다.
자연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하해(河海)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우리를 품고 베푸시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지요. 그래서 '어머니 지구'입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자연은 우리의 선생님 역할도 합니다. 사람들은 숲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배웠고 그것을 철학과 인문사회과학, 생태학에 접목시켰습니다. 생물의 외양과 존재방식을 응용한 공학, 의학 지식도 무수히 많습니다. 자연은 사람에게 또하나의 종합대학(university)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의 단기적 개발이익 때문에 줄곧 어머니 지구를, 우리의 스승을 마구 괴롭히는 탕아 짓을 해왔습니다.
영화 ‘자이언트’에서 텍사스의 황무지 땅을 개간하다가 땅에서 검은 원유가 분수처럼 솟아오르자 석유로 블랙 샤워를 하며 부자가 되었음을 한껏 과시하는 주인공 제트 링크(제임스 딘 분)의 두 팔 벌린 환희의 영화 장면을 떠올려 보시지요.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 따라 지구에 대한 지나친 철회와 영혼 없는 첨가가 우리들 삶의 공간을 파괴했고, 그 결과 어머니 지구의 아픔이 홍수, 가뭄, 슈퍼태풍, 토양과 해양의 사막화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부단한 탐욕과 잔인한 자연파괴가 도를 넘자, 어머니 지구는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홍수가 되고 앙상한 가슴엔 가뭄이 듭니다. 그 깊은 한숨이 엘리뇨에 따른 슈퍼태풍으로 돌변합니다. 어머니의 육신이 다 닳으면 거친 자갈사막만이 남습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샤토브리앙은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엔 사막만이 남는다”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은 이미 눈앞의 구체적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탐욕스런 개발이익의 추구는 지금도 계속 자행됩니다. 우리는 빈 땅만 보면 앞뒤 안가리고 삽질부터 시작합니다.
지방에선 미분양 아파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가지만 계속 아파트를 지어댑니다. 그렇게 건설실적을 쌓아야 서울 등 대도시에서 아파트를 시공할 기회를 포착해 돈을 버는 잘못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생태경제학자 우석훈에 의하면 “토건자본은 이미 강은 손을 봤고 일거리를 찾아 땅속 터널을 파거나 다시 산으로, 또 섬으로 개발대상을 확장해 나갈 것”으로 우울한 전망을 합니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보듯이 국가의 부당한 침해가 싫어 남쪽 섬으로 도피한 아나키스트 주인공 최해갑의 가족은, 그 섬마저 리조트를 짓는 난개발 대상이 되어 자본의 입김이 거칠게 밀려드는 슬픈 현실을 목도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기후변화 등 자연이 인간에게 가하는 대반격을 몹시 못마땅해합니다. 홍수 등 자연의 몸부림을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폄하합니다.
이는 전혀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자 진실을 호도하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이 괜히 인간을 해꼬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어머니 자연을 배신하고 괴롭혀서 어머니의 심신이 날로 피폐해진 결과가 기후변화, 또 그로 인한 홍수, 가뭄, 열대야, 사막화로 나타난 것뿐이니까요.
우리가 던진 탐욕의 부메랑이 이제 위험의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 자업자득의 결과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자연을 어떻게 보고 대해야 하는가? 라는 커다란 숙제가 남습니다.
물질문명의 향유를 향한 인간의 과속이 한땐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격언으로 받아들여진 시간이 있었지만, 이젠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이 기후-생태위기 해법이자 유일한 정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 사회 내에서 환경문제나 생태위기가 공론화되는 데는 적지않은 시일이 소요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국민소득 3-5천 불에서 비로소 환경문제가 인식되고, 5천불 이상이 되면 환경오염 문제가 비로소 국가정책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은 우리 사회는 이런 점에서 이미 환경오염이나 생태문제 해법에 상당히 진화한 환경 선진국이어야 합니다. 세계의 많은 선진국이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종래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탈(脫)물질주의 가치를 도입, 실천하는 환경대국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입니다(이도형, [우리들의 정부], 2016, 한국학술정보 참고).
우리 사회는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탈물질주의의 도정으로 일부 진입하고 있지만, 아직도 신개발주의 속성을 자주 드러내며 개발이익의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굴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문제는 우리가 아직도 과학기술의 문제해결력에 의존해 환경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는 지나치게 낙관론적인 환경관리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피크 오일(peak oil) 시대인데도 아직도 자연을 마구 파헤치고(자원 추출) 무책임하게 지구 위에 마구 버리는(폐기물 첨가) 경로의존성을 치유하지 못하는 철학의 빈곤 속에 사람들의 영혼 없는 일거수일투족이 그 끝을 모르고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도 끝없는 탐욕을 주체 못하며 자연을 개발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과학기술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여기서 인간이 자연을 보는 그릇된 관점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과 뼈저린 각성이 요구됩니다.
다음번 글에선 생태적 전일성, 생태적 존재성 논의에 터해 이 문제를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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