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세상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본문
인류는 지금 역사상 최고수준의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지만, 정작 태생적 뿌리인 자연은 잊고 삽니다.
까마득히 먼 옛날 물고기에서 시작해 사람의 모습으로 거듭 진화해 온 인류에게, 그 모태이자 서식처인 자연은 어찌 된 일인지 한갓 개발의 대상이 되거나,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나 도구로만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중심주의에 함몰되어 자연을 파헤친 결과, 우리는 지금 기후파괴 등 숱한 위험의 부메랑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업자득의 결과를 치유하기 위해, 인류의 시원이자 현 서식처인 자연을 보는 관점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자연을 보는 인간의 관점은 크게 2가지입니다. 분리적 관점과 통합적 관점이 그것입니다.
먼저 분리적 관점은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된, 즉 자연과 별개의 우월한 존재로 인간을 보는 것입니다.
반면 통합적 관점은 인간을 자연생태계의 한 부분, 그래서 자연과 인간을 한 몸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하찮게 여겨져 내가 그와 동일시되는 것이 못마땅하고 그를 한껏 무시하고 싶을 때, 그를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구분지어 대하려 합니다. 나와 그가 사는 곳을 애써 분리하려 합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유색인종이 가까이 사는 것이 싫어 자꾸 교외로 거처를 옮겨 나갔던 미국 백인들의 ‘차별은 않되 구별하며 살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런 분리적 관점의 생생한 증표입니다.
대상이 하찮아 얼마든지 타자화해도 된다는 이런 분리적 관점은 인간과 자연 관계에서 더 흔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엄연한 생명체인데도 수많은 풀들을 잡초라 홀대하며 마구 뽑아버립니다.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해 함부로 주변의 나무에 발길질하며 자연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행동엔 내가 자연보다는 절대 우월한 존재이므로 자연은 깔보고 무시해도 된다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란 허상 하에 자연을 업신여기고 괴롭힙니다.
기껏 필요할 경우에만 자연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고 마구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자연을 인간목표달성의 수단이나 자원으로 보는 '도구적 자연관'이 여기서 대두합니다.
분리적 관점이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연을 무시하고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분법적 자연관이라면, 통합적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한 몸으로 보는 일원론적 자연관입니다.
생태철학자 Taylor는 인간을 포함한 제(諸) 생명이 생명부양을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론적 사고에 의거해,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상호의존적 존재로 보며 그들 간의 ‘관계성’을 중시합니다.
만물은 좋든 싫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존재조건, 존재환경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그 상호연결성과 관계성 때문에 세상 만물은 서로 같이 존재할 때 각자의 존재감은 더 생기고 존재가치도 더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은 그의 저서 [강의]에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서로의 존재조건이 되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보며, 사람이 사는 것은 자연과 만나기"라고 정의합니다.
위의 논의들을 한마디로 깔끔히 정리해주는 것이 Pascal의 말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식론적 차원에선 인간은 자연을 대상화할 수 있기에 자연과 구분, 분리되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연을 도구적 가치가 있는 주변환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이 모든 생명체를 총괄하기에, 존재론적으론 자연이 인류를 포함한 제 생명의 절대적 생존조건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존재환경, 즉 인류서식처로서의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자연을 잘 지켜줘야 사람도 더불어 살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연에 대한 이런 통합적 관점은 생태적 전일(全一)성의 깊은 뜻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세상은 하나이며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흙<거름>(humus)과 사람(human)의 어근은 같고, 그런 점에서 사람과 자연서식처 간엔 밀접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를 생생히 보여주는 실례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연관(觀)입니다. 생태철학자 탁광일의 표현에 의하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숲을 베면 곰, 연어가 사라지고 그러면 범고래 수가 줄어들어 그것에 의존해 연명하는 사람에게도 타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애틀 추장은 "우리가 땅에 속해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며, "후손 7세대에까지 미칠 영향을 고려해 자연을 활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백인 개발업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자연-인간 관계망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터해,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체화(体化)성 혹은 생태적 배태성도 발견하게 됩니다.
생태적 전일성 속에서 인간의 태생적 기반이 자연임을, 즉 사람이 자연에서 배태되어 나왔음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느껴보는 것입니다.
자연을 인류의 고향이자 서식처로 보면, 더이상 자연을 정복과 착취 대상으로 삼기 어렵습니다. 자연을 파괴하면 곧 내가 살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무리하게 전개된 영주댐 건설과 낙동강 지류사업의 결과로 인해 내성천의 금빛 모래톱이 마구 파괴되자, 그 현장에서 들려온 내성천 주민들의 “강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프다. 내가 살아야 하듯 강도 살아야 한다”는 절규는 이런 생태적 배태성을 웅변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인 human과 흙인 humus의 어원이 같기에, 또 하나의 hum으로 시작하는 단어, 즉 , 겸손, 겸허(humility)한 마음이 자연과의 관계 맺기에서 꼭 필요합니다(카르티에& 카르티에,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참고).
겸손, 겸허는 사람들이 그간의 인간중심주의와 도구적 자연관에서 벗어나, ‘만물은 하나’라는 우주만물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뜻하는 생태적 전일성과 생태적 배태성을 먼저 자각하는 것입니다.
소설가 김탁환은 소설작업에서 ‘등장만물 평등주의’를 강조합니다. 소설의 주인공뿐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단역들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소설에서 묘사되는 나무, 동물 등 모든 자연에 대해서도 소중한 마음으로 세세히 묘사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앞세우기 위해 나머지를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자연에 대한 이러한 존중과 사랑의 과정이 전제되면 우리는 낮은 데로 임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식의 어설픈 생태계의 우두머리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생태계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상응하는 생태인이 지켜야 할 까다로운 책무에 대해서도 적극 동의할 수 있게 됩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구처럼, “짐승스런 편리보다는 사람다운 불편”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지요.
코헨은 그의 저서 [우리는 너무 오래 숲을 떠나 있었다]에서 인간-자연관계에 대한 이런 존재론적 인식에 터해, “우리는 너무 오래 숲을 떠나 있었다. 인간의 심리적, 사회적, 국제적 불안의 대부분 원인은 자연세계와 우리 생활수단의 충돌, 단절 때문이다. 이제 우리 개개인과 지구 모두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열대 제조업자로서의 열대 만들기 유혹에서 벗어나, 자연세계, 즉 지도의 푸른 부분의 방식과 지혜를 배우기 위해 하나의 습관이 될 정도로 그것과의 관계를 즐기며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해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친화력 이미지와 자연과의 좋은 관계맺기를 통해 지구 생태계를 보호하는 녹색의 산타클로스가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인류의 태생적 기반인 자연에 대한 생태주의적 시유(생태적 전일성, 생태적 배태성)에 터해, 자연에 대한 부정적 손길과 화풀이식의 발길질을 거두어들이고 사랑의 마음으로 더 다가갈 때, 자연은 우리에게 더 많은 베풂을 줄 것입니다.
돌아온 탕아인 우리도 자연의 베풂과 사랑 속에서 조금씩 철이 들겠지요. 허구한 날 땅에 머리를 박고 진종일 모이를 쪼아대는 닭이 아니라, 배부르면 눈앞에 맛난 사냥거리가 아무리 어른거려도 미동조차 않는 사자 같은 절제된 행동에 가까워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난개발보다는 꼭 필요한 개발만 하겠지요. 나아가 원시 상태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기 시작하고, 환경파괴 현장을 원상회복시키는 자연 복원에도 발 벗고 나서겠지요.
이제 긴 개발 여행을 접고 새로운 여행길, 생태여행의 기차에 오를 시간입니다.
검은 원유(原油)로 블랙샤워를 하며 부자가 되었음을 자랑하는 영화 ‘자이언트’의 주인공 제트 링크보다는, 국가의 폐해를 피해 피신을 온 남쪽 섬에서조차 난개발이 자행되는 현실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주인공 최해갑이 되어야 합니다(이도형, 사유(思惟) 참고).
우리가 세상의 생태적 전일성과 사람의 생태적 배태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자연의 연인이 되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랑하는 대상인 자연의 아픔을 대변하고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생태적 대리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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