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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글/대안적 발전 책 소개

문명에 반대한다

숲길지기 2011. 3. 26. 04:20

   존 저잔 편저, 정승현 옮김, [문명에 반대한다: 인간, 생태, 지구를 생각하는 세계 지성 55인의 반성과 통찰], 와이즈 북, 2009.

 

 

   책을 이것저것 읽다 보면, 현재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각종 정치경제 제도와 문화적 생활양식들이 인류의 역사상 극히 최근에 와서야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조지프 테인터는 [문명의 붕괴](대원사, 1999)란 책에서 “전체적으로 복합사회 현상은 인류의 삶 중 최근 나타난 예외상황인 것”으로 본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도 오늘날 우리의 물질적 삶을 옥죄는 자본주의 화폐경제시스템보다는 호혜, 선물, 증여, 나눔 등 비화폐 경제의 인류역사가 훨씬 길었다고 말한다.

   케빈 터커 역시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강압적 권력과 제도 등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자율적 개인으로 살았다고 하면서, 우리가 뼛속 깊이 무정부적 기질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원시사회엔 지도자, 정치, 법률, 범죄, 세금이 없었다. 즉 국민의 행동을 강압적으로 규제하는 정부라는 통치 시스템이 등장하기 훨씬 전엔, 자생적 질서와 연합적 행동을 전제로 하는 무정부적 삶이 평온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 제도와 생활방식들이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자연 선택된 승리의 결과물로 보고 적자생존을 거쳐 우리 앞에 우뚝 선 이 제도와 생활양식을 문명이라 부르고 있지만, 문명의 주요 통제기제인 인간 길들이기의 역사는 위에서 보듯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극히 짧은 것이다.

   불행히도 물질문명에 잔뜩 길들여진 채, 우리는 이에 대한 큰 의문 없이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불편함과 부당함에 주눅 들어 있다. 일례로 어플루엔자라는 말처럼 우리 현대인은 과도한 자본주의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투 잡스 등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 그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과음, 과식하고, 나쁜 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다.

   과거의 선조들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사냥, 채취하고, 나머지 시간은 노래, 춤, 의식, 섹스, 담소 나누기, 게임으로 보내며 자연 속에서 평온과 안일을 누렸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매력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뽐내며 다양한 문화생활을 영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시인, 야만인이라 부르는 인류의 선조들이 전염병에 노출만 안 되면 우리 현대인보다도 훨씬 강한 치아와 골격을 자랑하며 장수했다는 사실도 참 새롭다. 심지어 16세기의 미국 플로리다 인디언은 일생에 걸쳐 5세대 후손의 출생을 볼만큼 오래 살았다(존 저잔, 2009). 그러나 그들이 문명을 접하고 식생활을 바꾸면서 질병과 기형에 노출되고 생식능력 또한 감퇴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을 달리해 현 문명의 대표기제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를 옆으로 밀쳐두고 야만이라 불리는 과거의 인간 삶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전복적 계보학이라는 학문적 접근법이 있다. 옛부터 내려오는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들어 올리면 밑으로 쏟아지는 역사적 파편들이 많은데, 그것들을 주워 재구성해 맞추어보면 거기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역사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에 반대한다]라는 책은 이런 전복적 계보학의 한 산물이다. 이 책에서 존 란다우는 “우리의 할 일은 원시인의 발명”이라 말하고, 이 책의 편자인 존 저잔은 “미래의 원시인”이란 표현으로써 과거 인류의 삶 속에서 오늘에 요구되는 삶의 지혜를 찾기 위해 전복적 계보학을 시도한다.

    현 물질문명을 성찰하고 그 대안적 발전 패러다임을 음미해 볼 수 있는 내용은 이 책 안에 다음과 같이 수두룩하다.

   먼저 마두스리 무케르리에 의하면, 소-안다만 섬의 고볼람베 지역에 온지(Onge) 족이 살았는데, 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은 그 섬에 한정되어 그들은 섬의 모든 해안, 나무, 벌집을 잘 알고 그것을 아끼는 등 주어진 한도 내에 만족하며 섬을 지키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말로 현대 생태주의적 삶의 실천에 필수 전제조건인 ‘생물지역주의’의 생생한 사례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란 책에서 파라과이의 구아야키 족들은 족장이 그들의 자율성을 박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누군가가 족장이 되어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보이면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그를 일부러 왕따 시키는 등 서로 연대하는 지혜를 보였다.

   로이 워커는 선사시대인 헤시오도스의 황금시대에서 최고의 미(美)는 물질수준이 아닌 고요한 마음의 유지이며, 그 다음이 노역에서의 자유와 자연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수렵채취 시대의 원시인들이나 지금도 그들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현대의 원시부족들은, 적게 일하며 자신이 공들인 음식만 원하고 여가와 낮잠을 즐겼다. 그들은 근심걱정 없이 적은 물건을 큰 재산처럼 여기며 행복하게 살았다.

   데이빗 왓슨은 이런 원시사회를 아주 적은 것만 필요로 하고 모든 욕망이 쉽게 충족된 ‘최초의 풍요사회’였다고 평가한다. 원시사회의 도구는 가볍지만 우아하며, 그들의 세계관은 단순하지만 건강하고, 문화는 개방적이고 환희에 차 있었다. 거기엔 사유재산이 없었고 공동체, 평등주의, 협동 등이 삶의 준거였고, 근본적 우두머리가 없는 무정부사회이자 작은 노동이 즐거운 사회였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체가 각각 통일성과 주체성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존중되었다.

   그래서인가? 크레브쾨르는 수천 명의 유럽인이 인디언이 되었지만 자발적으로 유럽인이 된 원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고 고백하며, [한 미국농부의 편지]에서 진짜 새로운 사람은 백인문명을 버리고 인디언부족으로 돌아간 사람이라고 비약해 말한다. 소외 개념을 말한 마르크스도 자유롭고 공동체적 인간이 되는 것이 유적 존재를 실현하는 길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불행히도 우리가 종교처럼 숭상하는 물질문명에 의한 토지개발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식물종을 단순화시키며 각종의 질병을 야기한다. 게다가 탐욕과 파괴에 혈안인 현대문명은 불신, 거짓, 기계, 분열을 조장하며, 발견된 모든 것의 식민지화를 도모한다.

   루이스 멈포드는 이런 맥락에서 현 국가사회를 노동기계와 군사기계로 이루어진 ‘거대기계’로 본다. 전자는 분업, 계급분열, 생산 기계화, 약자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조장하고, 후자는 군사력 거대화, 동원, 강제, 정치권력 집중을 조장하는 등, “문명이 있는 곳에 제국이 존재하며 문명이 인류의 잘못된 진화를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슈펭글러 역시 문명이 모든 것을 기계화하고 자연을 노예화시키며 서구의 몰락을 재촉한다고 어두운 전망을 내린 바 있다.

   리차드 하인버그는 현대인이 야생성 길들이기와 표준화에 몰두하는 이런 문명악에 중독되어 공포에 의해 쉽게 조작된다고 비판한다. 또 기득권 세력은 이윤과 통제를 위해 인간의 욕망과 공포를 조율한다고 말하며, 자연에 가까운 삶이 최선의 삶이며, 수렵 채취인의 정신적, 물질적 우월성에 찬사를 보낸다. 일례로 호주 원주민들의 최고 존재목적은 땅을 돌보는 일이며, 지구와 동물, 자연을 주기적으로 재생시키는 일이다.

   다행히도 로이 워커는 우리 주변에 상기한 ‘황금시대의 특징’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위안의 말을 전한다. 평화주의, 채식주의, 공동체주의, 무정부주의, 토양보존, 유기농법, 땅에의 존경심, 자연치유, 분권화된 촌락경제가 그것인데, 페어차일드는 현대인이 이런 황금시대적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참여할 때 ‘고귀한 야만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존 모호크는 그의 글 [고귀한 선조들을 찾아서]에서 현대인은 수렵채취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지구 대부분 지역에서의 거주능력을 전수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인은 고귀한 야만인이 되어 황금시대의 생활방식을 실천에 옮기며 문명의 폐해를 걷어내고 유적 존재를 실현하는 길을 자율적으로 찾아가는 고귀한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정치철학자 글렌 파톤은 생태-심리학이란 독창적 학문분야를 제기하며, 환경위기의 원인은 현대인의 심리적 위기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면서 문명의 상처를 치유하는 심리과정은 ‘원초적 자아’를 강화하는 것으로 본다. 문명화 과정에서 압제자 등 외부 동일시 때문에, 우리가 자신의 부족(部族)적, 원초적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억제된 인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연 및 야생공간에 강한 정서적 유대를 느끼며 건강하고 야생적인 자연 속에서 소규모의 촌락공동체를 재건하는 대중운동에 협력할 때, 심리적 안정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변한다. 커크 패트릭세일도 이런 소규모 생태지역과 응집적 공동체를 부활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해 나갈 필요가 있으며, 특히 기술을 자연의 구속과 의무에 융합시키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여러 학자들이 제기한 다양한 방법론을 잘 취합해, 현 물질문명에 생태 친화적 수정을 가해야 한다. 또 과거 황금시대적 삶의 방식을 현대적으로 응용해 문명의 폐해를 스스로 치유하며 응집적 공동체를 부활해 내는 고귀한 야만인이 되는 길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