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 본문
여기 두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양 풍경화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 산수화입니다.
두 장의 그림은 자연 속의 사람을 묘사한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 묘사에서 두 그림의 큰 차이가 발견됩니다.
서구의 초창기 풍경화는 영주(領主)의 토지 소유권을 보여주는 토지대장(土地臺帳)이었다고 합니다. 마르틴 바른케가 쓴 [정치적 풍경]의 책 표지가 바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책의 표지 그림을 보면 한 무리의 귀족이 말을 타고 자기 소유의 광활한 장원(莊園)을 당당한 위세로 순시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광활한 농지는 영주의 부동산 즉 땅의 크기를, 농지에서 풀을 뜯는 가축과 나무들, 그리고 땅을 경작하는 농노는 영주의 자산규모를 상징합니다.
그림에서 땅과 동식물 등 자연은 세상의 중심인 영주와 그 가족의 주변배경이자 그들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작용합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자원이나 도구로 여겨지면, 그런 자연은 오래 남아나질 않습니다. 사람들 뱃속을 채우기 위해 빨리 이용해야 할 수탈대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서구 산업화과정에서 자연자원의 엄청난 철회 및 남용, 또 그 결과물인 과도한 폐기물 첨가 등 막대한 생태계 파괴를 낳았습니다. 또 유럽제국들의 해외식민지 개척과정에선 제3세계의 무자비한 자연약탈도 초래했습니다.
이젠 서양의 초기 풍경화에서 잠시 눈을 떼고 동양의 산수화를 찬찬히 감상할 차례입니다.
동양 산수화(예: 정선의 풍경, 김홍도의 병진년화첩 등)를 들여다보면, 웅대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한 귀퉁이에 머물며 고개를 들어 자연을 올려다보거나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자연의 품에 안긴 채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려는 겸허한 마음의 사람들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공존하려는 동양인의 마음은 그림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눈에 띕니다. 예컨대,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함부로 약탈, 남용하기보다는 오래도록 자연과 함께 하기 위해 아끼고 보살피는 길을 지향해 왔습니다.
송계(松契)가 그런 선조들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산림학자 전영우에 의하면, 송계는 땔감을 전적으로 나무에 의존했던 조상들이 산림의 지속적 활용을 위해 자율적으로 노동력과 기금을 갹출해 산림을 지키고, 자율규약에 따라 마을주변 소나무의 적정 벌채량과 산림 조성량을 매년 할당해 산림자원 고갈을 스스로 막았던 자치제도입니다.
조선조 전기의 금산(禁山)제도(지금의 그린벨트에 해당함), 조선 조 후기에 국가의 다양한 수요에 따라 산림을 기능적으로 세분화해 관리, 보호하던 시책인 봉산(封山)제도 역시, 임업 선진국인 독일보다 백년이나 앞서 움텄던 우리의 보속림(保續林)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자연과의 관계맺음에서 이토록 좋은 전통을 가졌던 우리가 어쩐 일인지 개발연대 하의 압축성장 신화를 들먹이며 이젠 서구보다 더 난개발을 일삼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라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에릭 스톤이라는 자가 나옵니다. 그는 풍요의 숲을 마구 벤 벌로 자기 팔다리를 뜯어먹다 죽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생태사찰 연구가로서 생태 모니터링을 강조하는 김재일은, “그린벨트를 마구 풀고 세수확장을 위해 난개발을 마구 허용하는 우리가 바로 그 꼴”이라며 매우 안타까워 합니다.
그는 "환경문제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옐로 카드라며, 더이상의 독생(獨生)이 아니라 자연과 상생하기 위해, 이젠 인간 생존권이 자연 생존권과 등가(等價)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몸엔 개발 DNA 외에 선조들의 보전 DNA가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개발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파헤쳐도 좋은 빈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터 잡고 살아야 할 생명의 장소로 땅을 인식했던 선조들의 생태적 지혜를 배우며 과유불급의 지혜를 되살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독생에서 벗어나 자연과 상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산이 말하고 강이 달리게 하라]의 저자 Brower는 미국 정부가 사람들의 관광 편의를 위해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안에 도로를 가설하려 하자, 이는 마치 “관광객이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더 잘 보려고 성당을 물에 잠기게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며, 책에서 CPR을 주창했습니다(Van Jones의 Green Color Economy에서 재인용).
CPR은 Conservation, Preservation, Restoration 등 3단어의 이니셜을 합성한 말입니다.
여기서 보호(conservation)는 당대를 기준으로 자연이 크게 훼손, 남용되지 않게 돌보는 것으로, 자연의 상업화, 개발주의를 일부 허용하는 것입니다.
반면 보전(preservation)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연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천연의 원시(pristine)상태 그대로 물려주는 것입니다. 복원(restoration)은 이미 파괴된 생태계를 자연의 원상태(original condition)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번 생태에세이 글(“자연은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다”)에서 자연에 덜 첨가하고 덜 철회하는 conservation 방법론을 살펴보았으니, 이번 글에선 보전, 복원 방법을 좀더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원생자연을 있는 그대로 잘 지켜서 후세대에게 남겨주는 보전 전략에 참고가 되는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2011년 미국 Oregon 주의 Oregon 주립대에서 연구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학이 소재해 있던 Eugene이란 작은 도시에서 1년간 거주하며 미국의 자연관리 방법에 대해 한동안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Eugene 시내엔 델타 폰드(Delta Pond)라는 이름의 큰 습지가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미 습지를 밀어버리고 대규모 택지를 조성해 큰 빌딩이 들어서고도 남을 시내 요지의 땅인데, 이곳 사람들은 더 이상 손을 안 대고 습지를 그냥 놔둡니다.
막개발과 참 보전의 가치가 첨예한 갈등을 자주 빚는 우리네 속사정에 비하면, 이곳은 갈등의 소지에 대한 질서 있는 답을 나름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개발 않고 그냥 놔두기”라는 정답을!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뉴욕 맨하탄의 큰 늪지를 개발해 더 높은 빌딩을 올리자는 디벨로퍼의 주장에 대항해, “이곳을 개발하면 나중에 우리 모두 정신병원에 가야 할 것”이라는 한 시인의 경종의 말 한마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맨하탄 한복판에 센트럴공원이 만들어졌음을 우리는 익히 압니다.
델타 폰드는 그런 점에서 유진판 센트럴 파크입니다. 현재 이곳은 도시 안의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고, 무엇보다 시민들의 훌륭한 산책로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라는 경구의 진실성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단기적 개발이익보다 장기간의 자연보전에 우선순위를 둘 때, 오늘 우리의 비움과 놔둠은 내일의 큰 얻음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Eugene 시의 서쪽엔 메도우락 프레이리(Meadowlark Prairie)가 있습니다. Prairie는 대평원, 큰 습지지역을 말하는데, 우리 식으로 보면 신도시 하나가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 광대한 이 땅도 큰마음으로 비워 놓으니, 자연이라는 큰 세계가 한가득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코앞의 달달함보다는 쓰디쓴 약 복용 뒤의 긴 치유력을 볼 줄 아는 맑은 눈과 긴 호흡이 필요하지요. 그런 점에서 ‘비움의 미학’은 우리가 평생 공부해야 할 인생 필수과목입니다.
보전은 이처럼 개발 환상에 젖어 무자비한 자연파괴를 자초할 소지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파괴되기 쉬운 우리 주변의 자연을 큰 마음으로 그대로 내버려둠으로써 위험의 부메랑을 사전에 적극 예방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보전이 어느 한 지역을 원시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라면, 복원(restoration)은 인간에 의해 훼손된 생태계를 적극 치유해 자연의 원상태(original condition)로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미국 생태복원협회에 의하면, 생태적 복원은 농업, 산업, 채광 및 레저 등의 인간활동으로 인해 위협 당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연의 고결성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정당한 자연 개입입니다.
Ryn과 Cowan이 공동 저술한 Ecological Design에 의하면, 복원은 질적으로 저급해진 생태계의 적극적 치유와 회복을 통해 자연의 본질적 가치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침식된 하천의 생물학적 재생, 토양 회복, 새로운 자연보호구역 창조가 이에 해당합니다.
복원전략의 생태친화적 함의를 되새기기 위해 유럽의 사행(蛇行)하천화와 동물서식지 복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투르(Thur) 강은 스위스의 북동쪽을 흐르는 라인강의 지류인데, 19세기 중반 세번에 걸쳐 큰 홍수를 겪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인공호안과 제방을 건설해 강을 직강화했습니다. 그럼에도 유속이 빨라지는 병목구간에 대규모 홍수가 다시 발생하자, 직선형 수로의 잘못을 깨닫고 자연형 사행하천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러자 생물다양성이 증가하고 생태계도 복원되었습니다.
유럽의 정부들은 제방을 없애 범람원을 다시 강에 되돌려주면서 강물이 넘쳐 흐를 수 있는 여유공간도 만들어 줍니다. 역(逆)간척 등 이런 최신의 토목기술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유연한 기술’이라 불립니다(최병성, [강은 살아 있다] 참고).
생태계 복원은 동식물 서식처의 복원과도 연관됩니다. 생태윤리학자 테일러(P. Taylor)는 인간-자연 관계의 균형을 위한 절차적 규칙의 하나로 ‘보상적 정의’를 제시합니다.
보상적 정의는 인간과 타 생명체의 관계를 인간이 파괴했을 경우 이를 교정해 도덕적 균형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파괴된 동물 서식지의 복원, 포획된 동물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기가 이에 해당됩니다. 지리산 반달곰 방사가 이에 해당합니다.
반면 우리는 생태복원과는 너무 거리가 먼 채 살아왔습니다. 그나마 잘 보전되어오던 그린벨트까지 야금야금 풀며 뉴타운, 신도시 개발 등 수도권과 대도시 외곽확장을 도모해 왔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오로지 세수(稅收)를 늘리기 위해 케이블카, 출렁다리, 스카이워크 설치 등 난개발을 마구 허가합니다.
그 와중에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가 너무 쉽게 눈앞에서 사라지고 잇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추진된 대운하의 의혹이 짙은 4대강 정비사업야말로 자연계의 순환성 원리에 따른 보전과 복원 원칙에 역행하는 대표적 난개발이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버려진 강들의 복원’이라고 말했지만, 국제적으로 저명한 하천전문가들는 4대강 사업을 ‘운하의 변종’이며, 복원을 가장한 파괴사업으로 규정합니다.
독일의 Bernhart는 대규모 준설이 강의 투수층 저층대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을 말살시킨 점과, 강을 운하와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 생길 수 있는 홍수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Kondolf도 생태계 관련규정의 과학기준을 적용할 때 4대강은 복원으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선진국의 준설연구가 몇십년 간 드물었던 이유는 준설이 매우 환경파괴적이란 인식이 이미 팽배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는 보(湺)로 막힌 강은 잘 흐르지 않아 수질도 매우 나빠질 것으로 예측했습니다(환경운동연합 홈피 참고, http://www.kfem.or.kr).
우린 해마다 4대강에서 벌어지는 녹차라떼 현상에서 이미 이를 현실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선 이런 점을 고려해 복원을 통한 재자연화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감수합니다. 일례로 미국 남부의 에버글레이즈 습지 안의 Kissimmee 강을 직강화하자 조류 90%와 척추동물 80%가 사라지고 플로리다만의 40%도 적조현상을 보여, 관광사업에 큰 타격을 입고 용수공급에도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직강화한 강을 다시 복원하고 제방을 제거했습니다. 직강화 비용은 3천만 불이었지만, 복원엔 그 10배인 3억 불이나 들었습니다.
생태계 파괴현장을 끊임없이 고발해온 최병성에 의하면, 우리의 4대강은 많은 나라들이 천문학적 돈을 들여 복원하는 맑은 여울과 드넓은 백사장 살리기가 하등 필요 없는 살아있는 강이었습니다. 그대로 두는 것이 공사비 22조 원을 모두 절약하고, 후손의 복원비 수백조 원을 아끼는 길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자연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며 가장 뛰어난 보전방법임을 값비싼 복원비용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제라도 생태적 전일성과 생태적 배태성에 대한 자각 아래, 도구적 자연관을 버리고 자연의 순환 원리에 따른 보전, 복원방식으로 자연생태계 관리를 차분히 시작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허구한 날 땅에 머리를 박고 진종일 모이를 쪼아대는 닭이 아니라, 배부르면 눈앞에 맛난 사냥거리가 아무리 어른거려도 미동조차 않는 사자와 같은 절제된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난개발보다는 꼭 필요한 개발만 신중히 하겠지요. 나아가 원시상태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기 시작하고, 환경파괴 현장을 원상회복하는 자연복원에도 발 벗고 나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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