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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정수일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아르테, 2022) 본문
얼마 전 실크로드학의 대가이자 문명교류학의 정초(定礎)자인 정수일 선생의 일생에 걸친 학문체계를 집성한 [문명교류학]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선생의 90 생애도 무척 궁금해 그의 회고록인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도 추가로 읽게 되었습니다. 또 선생이 추구한 종횡 세계일주의 마지막 여정을 다룬 책 [문명의 모자이크, 유럽을 가다 1]도 연달아 읽었습니다.
선생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집필에 몰두한 필생의 역작들을 연이어 읽어가면서, 생의 기나긴 여정에서 세상의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삶을 기록해 간 한 노학자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음미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생이 근 1세기의 시간(context)을 살아내면서 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던 그 사연들을 담은 책(text)들을 찬찬히 읽어보니, 컨텍스트를 반영한 텍스트들의 시대성이 더 잘 읽힙니다. 이런 점은 그의 회고록 제목인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로 잘 응축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90 노구를 이끌고 문명교류학이란 새로운 학문의 정초를 위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목숨 걸고 저술에 몰입해온 긴 시간을 상기하니 3권의 책을 읽는 내내 책들의 무게감이 더욱 생생히 전해집니다.
90세에 이르도록 저술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860쪽에 이르는 벽돌책 두께의 학술저서와 6백쪽이 넘는 회고록, 또 발로 쓴 두터운 북유럽 여행기를 말년에 저술한 것은, 선생의 학자적 소신과 소명의식, 학문 입론의 비전과 인내심이 없었다면 결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기선 3권의 책 중 그의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를 중심으로 제가 느낀 점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의 회고록은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본 우리의 굴곡진 근, 현대사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선생은 간도 출생으로 춥고 배고픈 이역만리에서 나라 잃은 민족의 애잔함과 숱한 간난의 삶을 이겨내기 위해 민족 자긍심과 가족애로 청소년 시절을 살아냅니다.
그의 어릴 적 간도 얘기를 읽다 보니 세계화 시대에 시대착오적 개념으로 경시돼 온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긍정의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역시 민족이란 개념은 어려운 시대 상황하에서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던 사람들 간의 굳은 단결과 연대, 공동체 정신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그 진의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후엔 근면성실한 한 청년의 대학생활 얘기가 회고록의 뒤를 잇습니다. 선생이 베이징대에 유학해 세상과 세계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공부에 여념이 없던 청년기의 숱한 담금질이 책에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선생은 대학시절 실용학문인 어문학을 수련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탐구형 학문으로 국제관계사를 전공으로 택하는데, 이는 나중에 선생의 필생의 학문인 문명교류학의 시원을 이루게 됩니다.
젊은 시절 선생의 치열한 삶의 분투와 차분한 내면 성찰을 들여다보면 요즘 청소년, 청년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됩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시대의 아픔을 기꺼이 이겨내려는 생의 의지가 굳건해 일찌감치 철이 들었고 다 성숙했습니다. 지금보다 덩치는 작고 키는 작아도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넓었고 생각은 깊었습니다. 각자의 꿈도 컸습니다. 그 꿈은 공익적이었습니다.
선생의 회고록을 보면, 생애의 매 단계마다 당시의 심정을 압축 상징하는 한자성어가 많이 나옵니다. 대학재학 시절 그의 사자성어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이었습니다.
사자상승은 ‘제자가 스승의 학문을 진지하게 이어간다’는 뜻인데, 북경대 재학시절 은사인 지센련 선생과, 아랍어학과 학과장이었던 마젠 선생의 학문세계와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고 익히던 신실한 시간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는 대학 공부를 마치고 북아프리카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합니다. 오랫동안 외교 업무를 수행하면서 또 이후 대학에 재직하면서 어릴 적부터 마음속 깊이 품어온 민족통일 과업에 올인합니다. 이로 인해 간첩 혐의로 투옥되기도 합니다.
0.75평의 감옥 안에서 그는 왕성하게 독서를 하며 학문을 닦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은 어쩌다 다가올 수도 있지만 지혜는 필히 찾아가야만 맛볼 수 있다는 생각, 늘 살아 움직여야 고인 물이 썩은 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그런 생각은 선생의 학문 입론(立論)으로 연결됩니다. 평생 학인으로 살아오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실크로드학과 문명교류학이란 학문의 정초에 뜻을 세웁니다.
긴 투옥생활 중 그의 사자성어는 수류화개(水流花開)였습니다. 이는 송나라 시인 황산곡의 시구에서 나온 말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 자연의 순리를 읊은 말입니다.
하지만 투옥 중이던 선생의 삶에서 이 말은,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므로 물은 항상 흘러야(水流) 함을, 또 꽃이 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열매를 맺기 위한 개화(花開)의 필연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엔 '수류화개'를 세상사는 다 잊고 그저 풍류를 즐기는 그런 한가로운 말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참뜻은 뭔가 결실을 맺으려면 먼저 피와 땀이 서린 고난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함을, 또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야말로 꽃처럼 아름다움을 내재한 사람이 되는 길임을 상징하는 말임을 뒤늦게나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0.75평 감방에서 번번한 책상 하나 없이 늘 쪼그려 앉아 가필(呵筆; 입김을 쐬어 언 붓을 녹임)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며 수많은 책을 집필한 것을 보면, 선생이 천상 학인(學人)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감방 안의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위아중(我爲重), 술이작(述而作), 천일정(穿一井)이라는 학문태도를 정립합니다.
위아중은 사대주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 것을 중시하는 정체성 있는 학문을 표방하는 것입니다. 술이작은 과거의 진리를 서술하는 것에 그치지(술이부작) 않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천일정은 이것저것 중심 없이 시류에 흔들리는 잡식성 공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한 우물 파기입니다.
선생은 천일정(穿一井)의 마음으로 문명교류학이라는 새 학문을 정초합니다. 그의 필생의 역작 [문명교류학]은 책이 무척 두껍고 학술용어가 적지 않아 읽어내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지만 찬찬히 끝까지 읽다 보면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세계사, 정치사, 문화사 등 인류 문명발전의 여러 흐름이 한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됩니다.
또 이 책은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는 헌팅턴 식의 문명충돌보다는 문명교류라는 보편문명 정립의 논리적 필연성과 그 논리체계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일생에 걸친 그의 저술방법은 현지답사를 거치며 늘 확인하고 필히 검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종횡(縱橫) 세계일주를 단행했습니다. 발로 뛰는 현장형 학자였던 그의 발자취는 수십만 장의 사진과 수십 권의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지식의 사회환원에도 기여해 388회의 강연 횟수를 기록합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불급(不及)이었습니다. 워낙 학문의 폭이 넓고 심도가 깊기에 그가 추구한 공부의 끝은 쉽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선생의 생애는 일생에 걸쳐서도 도달하기가 벅찬 광대한 공부의 그 끝에 다다르기 위해 번민하고 절차탁마하는 지난한 삶이었습니다.
평생공부라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으면, “더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 내일 낙조에 고이 묻고 훌훌 떠나리라”라는 심경을 회고록에 담았겠습니까.
선생은 결국 자신의 저술계획을 이룬 뒤 모든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그렇게도 꿈꾸어 왔던 공부의 끝에 닿았습니다. 오직 한 길, 학인의 삶을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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