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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에세이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숲길지기 2025. 8. 20. 13:02

 

 

큰집과 큰 차, 럭셔리한 비싼 명품, 그리고 최첨단의 것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꼭 갖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도 큰 차, 명품, 핸드폰 신상은 우리들 눈앞에서 자체 발광합니다.

 

우리는 한 마리 부나비(불나방)가 되어, 이들 발광체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빠져듭니다.

 

그러나 세상만사엔 명과 암이 있습니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눈에 잘 안띄는 작은 것들은, 큰 것들 속에서 그 존재감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용적이지만 저렴한 물건은 싼 게 비지떡이라고 쉽게 폄하됩니다옛것은 구시대의 유물이란 딱지가 붙으며 업신여겨집니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가 배기량이 큰 차를 애써 멀리하고 집의 규모를 합리적으로 줄여야, 에너지 과소비를 피하며 기후위기의 파고를 넘을 수 있습니다.

 

소비적 인정투쟁에 사로잡혀 사치스러운 위신재(威信財)로 치장하다간, 거렁뱅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가성비 좋은 물건만이 우리의 지갑 사정을 허락합니다.

 

디지털 모르모토가 되어 새것, 최첨단만 쫓다가는 자동화 기계와 로봇이 우리를 일자리에서 내몰고, AI가 사람들을 조롱하고 지배하는 무서운 세상이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우리가 심정적으론 아무리 크고 비싸고 새로운 것을 선호해도, 우리에게 허용된 현실적 대안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가성비 최고,’ 그리고 오래된 미래입니다.

 

지난번 글('익숙한 것과의 결별, 낮선 곳에서 아침 맞기')에서 과소비 문제에 대해선 한번 다루었으니, 이번 글에선 오래된 미래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전복적 계보학(subversive genealogy)이라는 학문적 접근법이 있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엎으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온 역사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땅에 떨어지는데, 그것들을 한데 모아 꿰맞추면 오늘의 문제를 푸는 데 유용한 한줄기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연구방법의 요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 현대적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못할 때, 해결은커녕 어떤 돌파구도 쉽게 찾지 못할 때, 오랜 전통과 선인(선조)들의 지혜를 역사속에서 리바이벌해 현대의 문제를 푸는 데 적극 응용해 보자는 것이 그 기본취지입니다.

 

오래된 미래,’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말은 그런 필요성을 잘 집약한  표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과거의 전통과 선인들의 지혜를 살펴보면,  거기엔 큰 것, 비싼 것에 대한 얘기가 아예 없습니다. 오히려 선인들이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며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온 점에서,  '오래된 미래'는 물론이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삶의 덕목도 선인들의 삶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주는 화려함과 단맛에 길들여져 소비욕망을 자제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숨겨진 구조적 억압과 부당함에 잔뜩 주눅 들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례로 [어플루엔자]란 책에서처럼, 현대인은 과도한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합니다. 과도한 노동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낳기 마련이고, 우리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과음, 과식합니다.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지속하다 보면 나쁜 병에 걸리고, 그로 인한 심적, 물적 고통 또한 매우 큽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직면한 과발전의 문제입니다. 

 

반면 우리가 원시부족이라 부르는 인류의 선조들은 배고픔을 이길 정도의 필요한 만큼만 노동(사냥, 채집)하고, 나머지의 대부분 시간은 노래, , 의식(儀式), 섹스, 담소로 보내며 자연 속에서 평온과 안일을 누렸다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기 삶의 주인답게 하루의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면서, 그야말로 '매력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뽐내며 다양한 문화생활을 영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물질문명을 옆으로 밀쳐내고 과거 원시사회의 삶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삶의 지혜, 특히 오늘의 기후생태위기를 해소하는 데 유용한 생태적 지혜를 적지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명에 반대한다: 인간, 생태, 지구를 생각하는 세계지성 55인의 반성과 통찰]은 그런 면에서 이번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전복적 계보학의 생생한 실례를 보여주는 좋은 문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의 편저자인 존 저잔은 과거 인류의 삶 속에서 오늘에 요구되는 통찰과 삶의 지혜를 찾는 전복적 계보학의 일환으로 ‘미래의 원시인을 등장시킵니다.  책의 집필에 참여한 존 란다우도 우리가 할 일은 원시인의 발명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왜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세계지성 55)이 원시인의 발명을 오늘 우리의 숙제로 강조할까요? 제 생각엔 그들이 원시인의 생각과 삶을  오래된 미래로 보고,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말을 의미있는 격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 책엔 현 물질문명을 깊게 성찰하고 원시사회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귀중한 내용들이 다음과 같이 수두룩하게 담겨 있습니다.

 

먼저 마두스리 무케르리에 의하면, -안다만 섬의 고볼람베 지역에 살던 온지(Onge) 족은 비록 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그 섬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섬의 모든 해안, 나무, 벌집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자기 몸처럼 아끼는 등, 자기에게 주어진 지역적 경계 내에서의 삶에 흡족해 하며 오랫동안 섬을 지키며 살았다고 합니다.

 

리차드 하인버그도 호주 원주민들을 예로 들며, 그들의 존재목적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돌보는 일이며 지역내의 동물과 자연을 주기적으로 재생시키는 일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자연에 가까운 삶을 최선의 삶으로 규정하며 살았던 수렵 채취인들의 정신적 우월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제 생각엔, 위에서 소개된 소-안다만 섬의 온지 족과 호주 원주민의 삶은 현대 생태주의에서 중시하는 거주조건인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의 생생한 실례로 볼 수 있습니다.

 

생물지역주의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자연생태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인간의 생활시스템을 고치고 지탱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온지 족과 호주 원주민들은 옛부터 주어진 생태-문화적 경계를 존중하고 지켜나가면서, 지역의 장소가 주는 리듬에 맞춰 자연과 조화롭게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시부족들의 이런 삶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에 단기적 개발이익을 노리고 함부로 삽질을 가하는 우리네 난개발 현장과, 지방소멸을 구실로  불필요한 도시외곽 팽창이 빈번한 우리의 지역현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합니다.

 

같은 책에서 로이 워커는 선사시대인 헤시오도스 황금시대에서 최고의 미()는 물질적 풍요가 아닌 고요한 마음의 유지였고, 그 다음이 노역의 자유와 자연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수렵채취 시대의 원시인들이나 지금도 그런 원시적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현대 원시부족들은, 적게 일하고 자신이 공들여 만든 음식만 취하며 여가와 낮잠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적은 물건을 큰 재산처럼 여기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데이빗 왓슨은 이런 원시사회를 아주 적은 것만 필요로 하고 모든 욕구가 쉽게 충족되는 최초의 풍요사회였다고 평가합니다. 원시사회의 도구는 작고 가볍지만 우아했고, 그들의 세계관은 단순하지만 건강했으며, 문화는 개방적이고 환희에 차 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원시사회엔 사유재산이 없고 공동체, 평등주의, 협동이 삶의 준거였습니다. 필요한 만큼의 자율 노동, 작은 노동만 하면 되었기에 매일매일이 즐거운 사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것, 비싼 것에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현대인의 민낯을, 또 그것을 얻지 못지 못한 좌절감에 스트레스를 받고 남을 해하면서까지 손아귀에 쥐려는 발가벗은 소유욕망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 책의 공동저자인 로이 워커는 우리 주변에 상기한 황금시대의 특징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며 위안의 말을 전합니다. 분권화된 촌락경제, 공동체주의, 평화주의, 채식주의, 토양보존, 유기농법, 땅에의 존경심, 자연치유 등이 그것들입니다.

 

페어차일드도 현대인이 이런 황금시대적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참여할 때 고귀한 야만인이 될 수 있다고 희망찬 말을 전합니다.

 

지금까지 전복적 계보학의 일환으로, 근대화가 야기한 서구의 많은 과()발전의 문제점과 반() 생태적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힌트를 과거 원시사회의 전통에 내재된 삶의 지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의 과발전, 기후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오래된 미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에서 찾자는 것이 [문명에 반대한다] 란 책의 집필에 참여한 세계지성 55인의 공통된 바람이었습니다.

 

특히 원시사회의 덕목인 공동체주의, 땅에의 존경심, 자연치유, 자족의 삶, 토양보존 등은, 과학기술낙관론에 치우쳐 기후문제 해결에 환경공학적 사후관리 해법(: 오염수치 축소, 환경법적 규제)을 반복하는 현 서구의 기후변화 대책의 한계를 성찰하고, 선인들의 생태적 지혜를 참고해 극복할 수 있는 많은 응용의 여지를 남겨줍니다.

 

과거의 지혜를 오늘의 생태문제 해법으로 응용한 사례는 동양사회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자연-인간의 분리적 관점에서 자연을 얼마든지 정복, 개발할 수 있는 주변 환경(environment)으로 하대해온 근현대 서양인들의 인간중심적 사고와 달리, 동양에선 자연-인간의 통합적 관점에서 생태(生態)를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하려는 사유의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 실례를 공자의 생명 이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양정치철학자 배병삼에 의하면, 공자는 세계의 주인공이던 내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닌 손님 혹은 배경이 되고, 배경처럼 존재하던 자연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뒤집어 보기를 강조합니다.

 

일례로 물()이 인간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게(self-so) 흘러가는 곳에서 인간은 단지 손님에 불과한데, 우리는 계곡을 상수원으로, 강을 운하로, 바다를 영해로 구획하고, 하천관리, 강 정비 등의 용도로 물을 대상화하며 자연을 도구로 소외시켰습니다.

 

뒤집어 보기를 통한 성찰적 이해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 보기에 길들여졌던 눈을 뒤집어 거꾸로 세상을 보도록 가르쳐줍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비로소 알고, 단독자로서의 나를 이겨내고(克己) 자연과 함께 하게 되는(復禮) 그 순간이, 공자가 말하는 극기복례이자 인()의 실천입니다.

 

공자는 왜 자연에 대한 뒤집어보기를 강조했을까요? ()유학의 논지에서 우주--사람의 관계를 재정립한 Tu Weiming의 생각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유학자 Tu Weiming에 의하면, 사람은 대우주(macrocosm) 안에 자리 잡은 소우주(microcosm)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우주의 자식으로 보는 것이 옛 동양인들이 생각한 천--인 관계의 핵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천--만물을 한 몸(one body)으로 인식해야 하며, 그래서 자연을 지배, 조종하기보다는 우주의 자식인 사람으로서 모든 생명체의 청지기역할을 부여받게 됩니다.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인식론을 중시한 동양사회에선 생태철학자 윤형근의 표현처럼 자연과 친숙한 삶, 자연에 일치되는 삶,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강조됩니다. 따라서 내 주변의 모든 것을 경시해 함부로 버리고 파괴하는 행동은 크게 삼가야 할 행동이 됩니다.

 

예컨대 불가(佛家)에선 썩은 나무들의 땔감 사용조차 금지해 왔습니다. 고목(枯木)은 수많은 숲속 생명이 도사리며 먹고 사는, 즉 새와 벌레의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엔 하찮은 미물이지만 숲속의 낙엽과 죽은 나무를 벌레와 새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선 안 될 천연 서식처로 보았던 따뜻한 눈길이 우리의 옛 선인들에겐 있었습니다

 

선조들은 자연이 주는 수분과 영양소 유실을 막기 위해 불탄 묘지에 짚을 뿌리고, 논둑에 자운영이나 콩을 재배해 자연의 질소순환을 도왔습니다. 이는 기존의 재배식물을 이용해 땅을 기름지게 하는 생태학 원리를 실천한 것으로, 현대의 유전공학이나 생태공학에 못지않게 과학적 원리를 응용해 과학적 결과를 얻어낸 (이도원, [생태에세이] 참고)  선인들의 생태적 지혜의 한 단면입니다.

 

땅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값진 생각을 여기서 하나 더 소개해볼까 합니다.

 

리베카 솔닛의 [야만의 꿈들]이란 책을 보면, 빅토리아 시대의 서구 남성들은 대지를 신부로, 즉 정복자의 관점에서 자신이 개발해 주길 기다리는 수동적 공간으로 인식했습니다. 반면 우리 선조들은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습니다.

 

자생풍수 지리학자 최창조에 의하면, 자생풍수에선 땅을 어머니로 대합니다. 자신의 태생적 뿌리이자 자신을 키워주고 보듬어주는 모성의 주체로 땅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개발은 어머니인 땅을 자식인 내가 맘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땅에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지는 자연에 신세지고 은혜를 입는 일로서 궁극적으로 자연과의 조화를 뜻하므로, 오늘의 마구잡이 토지이용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 됩니다.

 

세상 만물이 생로병사를 겪듯이, 항상 건강하고 완벽한 어머니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생풍수의 비조(鼻祖)인 도선대사는 비보(裨補) 풍수를 주창했습니다비보풍수는 큰물이 모이는 합수(合水)지점, 홍수나 침수 위험이 큰 곳, 낭떠러지 밑이나 절벽 바로 위에, 절을 세우거나 불탑을 세워 흠결 있는 땅을 불교의 힘으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비보풍수는 어머니 땅의 피곤을 풀어드리고 병을 고쳐 어머니의 기분을 온화하게 해드리는 '치유의 지리학'이라는 게 자생풍수 지리학자 최창조의 해석입니다. 여기엔 흠결 있는 땅마저 소중한 땅으로 보듬어 살아있는 땅으로 재생시키려 했던 참된 국토사랑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땅에 대한 선조들의 인식에서 한가지 더 눈여겨 볼 점은, 30.3센티미터의 땅()도 대단한 것으로 여겨 넓은 땅으로 대하고, 3.03센티미터의 한푼 어치 흙()도 경작 가능한 땅으로 귀중히 여겼던 척지촌토(尺地寸土) 정신입니다.

 

선조들의 이런 척지촌토 정신에서 평등산하 하무처(平等山河 何無處)의 국토 인식이 가능했습니다. 선조들은 "우리의 산하는 모두 평등하므로 내가 어디에 놓여 있다 한들 다 괜찮은 것" 으로 생각했습니다(박태순, [나의 국토 나의 산하] 참고).

 

문제는 후손인 우리들이 선조들의 땅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나 생태적 지혜를 망각한 채,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혀 생태계를 교란하고, 단기적 난개발이나 반 생태적 개발을 자행하고 있는 점입니다.

 

선조들의 척지촌토 정신과 평등산하 하무처 인식은,  큰 땅, 비싼 땅, 새 땅만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척지촌토, 즉 아무리 작은 땅일지라도 이 세상의 모든 땅은 모두 소중하기에 어느 땅도 차별할 수 없다는 선조들의 평등산하 하무처 인식을 배워, 그저 투기목적으로  비싼 땅, 큰 땅만 선호해온 우리의 헛되고 짧은 생각을 빨리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오래된 미래,’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전제 위에서, 원시사회의 생활지혜와 동양 선인들의 생태적 지혜를 전복적 계보학에 의거해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문명에 반대한다]란 책에서 세계지성들이 제기한 원시사회의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예: 생물지역주의, 땅의 존중, 토양보존, 자연치유 등)을 잘 취합해, 현 물질문명에 생태 친화적 수정을 가할 수 있습니다.

 

과거 원시부족의 삶의 방식(예: 적은 노동시간 등 매력적 라이프 스타일 , 공동체주의, 자족의 삶 등)을 현대적으로 응용해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스스로 치유하며 응집적 공동체를 부활해 내는 '고귀한 야만인'이 되는 길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또 오랜 세월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생태적 지혜에 내재된 현대적 응용 포인트를 하나 둘씩 실천에 옮기는 작업도 즐거운 마음으로 해나갔으면 합니다.

 

자생 비보풍수척지촌토 정신, 평등산하하무처 정신  후손인 우리에게 땅을 보는 올바른 관점과 참된 국토사랑법, 또 욕망자제 노하우와 삶의 속도조절 방법론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미래,’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와 더불어 척지촌토 정신에 내재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삶의 이치에 맞기에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가  필히 귀 기울여야 할 삶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까지 긴호흡으로 살펴본 원시부족들의 삶의 지혜와 우리 선인들의 생태적 지혜를 현시점에 맞게 변용해 보는 시간들을 자주 가져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과도한 소유욕과 현 기후위기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손 놓고 있는 소극적 우리에서 벗어나, 어렵지만  자본주의 물질욕망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우리네 삶의 서식처를 스스로 지켜 나가는 능동적 우리로 조금씩 변해갈 수 있습니다.

 

큰 것, 비싼 것, 새것만 추종하는 부나비에서 벗어나, 작지만 아름다운 것, 값싸지만 가성비 좋은 것, 낡고 오래되었지만 미래의 가치를 내재한 것들에서 많은 힌트를 얻어,  기후위기 시대의 파고를 능동적으로 뛰어넘는 슬기로운 우리들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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