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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에세이

어디서 살까? 어떻게 살까?

숲길지기 2025. 11. 20. 17:17

 

어디가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지?” “인생 폼나게 한번 살아보려면 어디에 터를 잡아야 할까?”

 

우리는 이처럼 살고 싶은 곳에 대한 관심이 많고, 어디에 터를 잡으면 좋을지 고민도 많습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어디에 바로 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처를 정하는 것은 경제 형편과 가족 모두의 생활수요 등 많은 점을 고려하며 신중히 결정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이지요.

 

하지만 현실의 삶이 고될수록, 또는 현재가 고인 물처럼 꽉 막혀 있고 너무 따분할 때, 거처에 변화를 줘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우리의 몸부림 또한 강해집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 후 귀촌귀농을 꿈꾸는 요즘, 나이 들어 살 만한 곳에 대한 로망도 날로 커집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의 지리서로서 18세기의 옛사람들이 생각하는 가거지(可居地)의 원리, 즉 지금 말로 하면  '주거지 선호기준'을  다룬 [택리지] 책은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열대야 등 글로벌 보일링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왕이면 자연 가까이에 터를 잡고 살길 원합니다. 베이비부머들이나 현실에 지친 젊은이들의 목가(牧歌)적 전원생활 로망이 바로 그 징표입니다.

 

사람 욕심엔 원래 끝이 없는 법이어서 사람들은 자연에서의 목가적 전원생활을 꿈꾸면서도, 이왕이면 생활편의나 문화생활에도 큰 지장이 없는 그런 곳을 일생의 거처로 원합니다.

 

문제는 많은 이의 희망사항인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은 그리 흔치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문명을 추구하고 그것에 입맛을 들일수록 주변의 자연을 걷어낸 뒤 그곳에 아파트 등 크고 높은 건물을 많이 짓고, 공장 부지나 마켓 부지도 더 많이 확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질문명을 맛보려면 그만큼 자연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또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데 크게 주저함이 없는 것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자연은 그래도 서울이나 대도시를 벗어난 지방에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 출신인 베이비부머는 사정이 좀 낫습니다.

 

그들의 자연 접근도는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젊어선 그렇게 떠나고 싶던 고향을 은퇴 후엔 자꾸 찾아갑니다.

 

한뼘 고향 땅마저 없는 서울내기들은 [택리지]를 뒤지며 살 곳을 물색하거나, 차를 몰고 전국 방방곳곳을 돌며 자기 취향에 맞는 살 만한 곳을 찾아내려 열심입니다.

 

[택리지]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가거지(可居地)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부분인 복거(卜居) 총론입니다. 이 책에선 사람이 살 만한 복거의 조건으로 다음의 4 조건을 듭니다.

 

"첫째로 지리가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생리(생활편의에 유리한 위치)가 있어야 하며, 그 다음은 인심이 좋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택리지]에서 살펴본 가거지의 원리를 요약하면 결국 자연(지리, 산수)과 문명(생리, 인심)을 아우른 곳이 사람이 살 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좀처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물질문명이 극대화된 현대로 올수록 두 가지 조건의 겸비는 더욱더 어려워집니다.

 

자연을 원하면 생활편의가 곤란해지고, 생활편의를 좇으면 자연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택리지 식의 가거지 원리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면 자칫 환경결정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리, 생리, 산수, 인심 등 복거(卜居)의 요건을 다 갖춘 얼마 안되는 지역에서 살아야만 살기 편하고 그래야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면, 그런 주거환경을 못 갖춘 더 많은 지역은 사람 살 데가 못 된다는 매우 슬프고 허무하기까지 한 부정적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경결정론은 몇몇 곳만 주거지로 떠받들고, 나머지 지역은 하찮게 여기며 다른 대안을 충분히 찾으려 하지 않게 하는 점에서 분명히 닫힌 사고입니다.

 

모든 결정론적 사고가 그렇듯이 환경결정론의 폐해는 큽니다. '희소성의 법칙'에 따라 그런 조건을 갖춘 몇몇 지역으로의 진입을 과다하게 조장하고 막대한 진입비용을 강요합니다. 지금의 부동산 투기열풍도 그 실례 중 하나입니다

 

지리, 생리, 산수, 인심을 다 갖춘 곳은 실제로 많지 않으며, 더욱이 그런 곳을 억지로 만들려고 메가시티를 조성하고 신도시를 더 많이 개발할수록 자연은 더욱 망가집니다.

 

국가-자연(자연이 국가의 성장도구로 폄하되고 악용되는 현상)이 판치고, 그 결과는 국재 산하파(國在 山河破)임은 이미 이전 글에서 상세히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선조들의 평등산하 하무처(平等山河 何無處) 정신이 한가지 대안으로 어필해 옵니다.  우리 선조들은  "우리의 산하는 모두 평등하므로 내가 어디에 놓여 있다 한들 다 괜찮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열린 사고에 힘입어, 이 땅의 많은 곳에 터를 잡고 살아볼 수 있다는 넉넉한 마음과 생각의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몇몇 지역 외엔 대안이 없다는 환경결정론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나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긍정의 씨앗을 찾아내 그곳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살겠다는 '환경적응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선 지역의 잠재력을 잘 살려 가거지의 원리를 맞춤형으로 새롭게 발명해내는 '환경조성론'도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가거지 요건에 대한 닫힌 사고의 한계를 보이는 택리지 식 사고방식보다는, 평등산하 하무처 정신에 따라 이 땅의 모든 곳이 사람 살 만한 곳으로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고, 그곳들을 잘 보듬고 더 다듬어서 많은 지역을 가거지로 만들어내는 열린 사고실험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반 백성보다는 다분히 사대부 중심적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따져본 이중환의 [택리지]보다는도보여행가 신정일의 [신 택리지]가 더 나은 텍스트로 생각됩니다.

 

신정일 선생은 오랜 세월 여러 지역과 마을을 답사하며 상처뿐인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면서, ‘어디서 사느냐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모색이어야 한다는 신선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어디서 살아야 하느냐가 가거지, 복거 등 환경결정론의 한계를 보이기 쉽다면어떻게 살 것인가는 환경적응론, 또는 환경조성론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고향의 재발견, 지방의 재발견'이 현실적 대안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고향의 재발견, 지방의 재발견을 통해 평등산하 하무처 정신의 실현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태어난 고향이나 지금 살고 있는 현 거주지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합니다.

 

고향이란 곳은 참 의미심장한 곳입니다. 고향은 많은 사람이 태어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곳, 즉 우리의 영원한 태생적 뿌리 같은 곳입니다.

 

명절 때마다 우리가 온갖 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민족의 대이동을 하는 것도, 세상사에 지치고 힘겨울 때 찾아가 안기고 싶은 포근한 곳, 그립고도 안온한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방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할 숙명의 거처이기도 합니다. 일생에 걸쳐 그곳에서 오래 살고 있어 좋든 싫든 그곳의 토양과 공기, 산천과 문화에 이미 익숙한 곳입니다.

 

우리가 마음만 고쳐먹는다면 고향이나 현 거주지는 이미 우리 몸에 밴 매우 익숙한 곳이기에,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서울보다는 훨씬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또 마음의 여유에 힘입어 그곳을  더 나은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대안도 차분히 모색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지방소멸 위험이 크다고 너도 나도 친구 따라 강남 가듯고향을 떠난다 해도, 우리가 그렇게 깃들길 간절히 원하는 서울(강남)은 절대 우리를 다 받아주지 않습니다. 아니 문밖에서 내칩니다선망의 대상인 서울도 이미 많은 문제를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증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막막하고 따분해서 도망치듯 고향을 등지려는 마음이나, 현 거주지에 쉽게 정을 주지 못한 채 더 좋은 물질적 조건을 갖춘 대도시로 탈출할 날만 호시탐탐 노리던 그간의 좁은 마음을 다 정리하고, 고향 땅과 현 거주지를 평등산하 하무처로 만드는 데 다 같이 지혜와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책을 쓴 웨더포드는, “자기가 속한 땅의 노래를 아는 자만이 그 땅을 보살피고 그 안에서 사는 방법을 안다. 한 지역의 노래를 소유하고 그것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그 지역의 정당한 소유자이다. 노래를 안다는 것은 그 땅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 말합니다.

 

참 멋진 말입니다. 새겨들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우리도 땅의 노래를 당당하게 부르는 진정한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거주자로서의 책임감을 다해야겠습니다. 더 많이 고민하고 진지하게 실천에 임해야 합니다. 그것에 소요되는 참여비용도 기꺼이 지불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지역 자연은 곳곳이 크게 병들어 있습니다. 그간 국가-자연으로 왜곡되어 파괴돼 온 국토의 산하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마구 파헤쳐진 고향산천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한 재자연화를 통해 병든 고향산천을 원래의 모습으로 점차 복원시켜 삶의 터전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또 자신이 속한 땅을 세세히 공부하고 더 많이 알아가면서 지역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야 합니다. 그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상의 존재방식과 리듬에 맞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땅의 본래 주인답게 땅의 노래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습니다.

 

한 지역의 거주자(이하 지역민)는 매일 그곳에 살면서 생활의 많은 영향을 받아 무엇이 지역현안인지를 피부로 체감합니다. 자신이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원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사는 지역이 어떻게 갖춰지고 변화하면 좋을지를 매일 길을 오가며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고향이나 현재 살고 있는 곳을 열린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면, 거주지로서의 조건을 새롭게 갖추는 데 요구되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방엔 대의를 위해 사람들이 함께서기 할 수 있는 공동체(community) 정신도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도 지역민들은 오랜 세월 축적돼온 고향이나 현 거주지의 시공간지식(time & space knowledge)에 대해 자주 듣고 익히 알고 있어 이를 꺼내어 잘 활용하면, 지역문제의 맞춤형 해법이나 고유성을 살린 독자적 지역발전의 길을 스스로 강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역민들의 '당사자 주권'이 중요시됩니다. [돌봄의 사회학]을 쓴 우에노 치즈코에 의하면, 당사자는 단순히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를 알고 변화를 꾀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현재 나의 상태가 앞으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부족한 것을 파악하고 새로운 현실을 이루려는 구상력을 가질 때, 비로소 자신의 니즈(needs)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데이때 그 사람은 비로소 당사자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에노 치즈코는 니즈는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니즈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사회를 구상하려는 것이라며, 니즈와 당사자성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결국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키 포인트입니다. 지역의 발전은 지역민이 스스로 도모하는 자()동사적 발전입니다.

 

나와 우리의 니즈, 즉 고향이나 현 거주지를 나와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다같이 생각을 모으고 기꺼이 참여비용을 지불할 때, 대도시에 비해 아직은 많이 남아 있는 지역 자연을 온전히 지키면서 어느정도 생활문화도 자급자족해낼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을 우리 손으로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지방소멸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생활사막, 문화사막이 줄어들면서, 지역민이 원하는 맞춤형으로 지역의 주거환경을 스스로 가꿔나가는 환경조성론이 현실화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자꾸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동네를 지켜보면 지역의 좋은 점도 하나둘 더 눈에 들어옵니다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생활문제나 지역의 단점도 좀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게 되고 그런 긍정의 시선에서 문제해결의 해법도 더 잘 생각납니다.

 

퇴근 후의 저녁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마실가듯이 동네 산책길을 자주 나서기를 권유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동네산책이 지역사랑으로다시 지역사랑이 지역발전에의 참여로 연결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택리지 식의 환경결정론을 넘어서, 우리 손으로 직접 가거지(可居地)의 새 원리를 만들어내는 환경조성론도 가능해집니다그리고 그 길 끝엔 평등산하 하무처 정신이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단단한 현실로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