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갈등 (II) 본문
이제 사람이 사람답지 못해 야기된 3차원의 갈등 양상과 그 기본적 치유방향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고별강연의 대상이 행정학과 학생들이기에 미래의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는 점을 널리 양해 바랍니다.
첫째, 인간 대 인간의 갈등입니다. 이윤추구를 위한 무한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속도효율, 성과효율을 잣대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왔습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뒷전에 서지 않기 위해 무한경쟁, 벌거벗은 경쟁에 너도나도 뛰어들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부자 되세요’라는 CF가 이런 상황을 웅변합니다. 그 누구도 삶의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과정에 각자도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과효율에 따라 사람은 획일적으로 줄 세워지고, 그 결과에 대해선 각자도사(死)의 가혹한 운명만 기다립니다.
그래도 부모를 잘 만나면 가방끈이 길어집니다. 가방끈이 길어야 정보격차, 취업격차, 자산격차 등 격차사회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환경결정론입니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갑이고 누구는 울며 겨자먹기로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갑과 을의 나라에선 갑질만 성행합니다. 어쩌다 을의 반란이 일어나도 금방 잊힙니다.
기회균등의 대표적 제도인 교육이 어쩌다가 이제는 부모의존적 능력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해, 정보격차, 자산격차 등 격차사회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부모의 경쟁력이 자식의 경쟁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정 사회학에 의하면 사람들이 품었던 내일의 희망이 무자비하게 깨지며 오늘의 절망이 되면, 가진 자에 대해 질투가 싹트고 그것이 오래 방치되면 극심한 분노로 변합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는 그 실례가 바로 태극기부대 등 할아버지 아스팔트 세대와 요즘 청년들의 극우화 현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시 반문하게 됩니다. 나라의 대다수 주인이 차별받고 찬밥 신세가 되며 그들 눈에 미래가 안 보이니 다수의 불만과 분노가 동료시민을 향합니다. 차제에 많은 것을 재정비하지 않으면 인간 대 인간, 특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갈등 수위는 더 높아만 갈 것입니다.
러시아계 미국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말하는 약자생존 법칙이 부자와 빈자 간 갈등의 한 해답일 수 있겠습니다. 약육강식의 적자생존보다는 ‘약자들도 차별 없이 능히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촘촘한 사회안전망과 복지망이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합니다. 저출산 초고령화 시대에 대비한 생애주기별 사회안전망과 통합돌봄망이 든든하게 꼭 마련되어야 합니다.
약자생존 법칙이 실현되려면, 나라살림하는 공무원들이 지금의 높은 계단에서 몇 계단 내려와 더 낮은 데로 임해야 합니다. 즉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현장행정, 발품행정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해라는 영어 단어(under+stand)의 뜻은 높은 계단에 서 있던 사람이 몸소 계단을 내려와야만 실현 가능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약자와 눈높이를 맞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살림꾼은 그렇게 ‘사랑하는 대상’이 많아야 합니다. "난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가수 정수라의 노래 가사처럼, 공무원들이 자신의 태생적 뿌리인 동료 시민들의 아픔과 생활고를 자신의 문제처럼 여기며 역지思지 역지感지 역지行지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런 적극 행보에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공직사회에서 자주 드러나는 고위직 공무원의 관피아 현상과 중하위직 공무원의 지나친 보직경쟁인 것 같습니다.
한 부처의 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책임집행하는 주요 직위인 고위공무원들이 정년 후 자신의 재취업 등 후일을 도모해, 가진 자들의 가려운 곳만 긁어주는 관피아로 남아선 곤란합니다. 하위직 공무원들도 자신의 직장생활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상사의 인사권이 두려워 마냥 상사의 기쁨조가 되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빽 하나 없이 각자도생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이, 동료시민을 대신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살림을 대행하는 대표시민인 공무원들의 기본책무라는 것을 여러분들의 미래의 일터인 공직사회 안에서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공무원이 좀더 마음을 쓰고 몇 발자국 더 움직여서, 시민 모두가 동일 출발선에 언제나 설 수 있는 ‘기회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공무원들이 그 경쟁률 높은 공직시험에 합격했다고 능력주의 오만에 사로잡혀 있어선 곤란합니다. 부모의존적 능력주의 오만에서 벗어나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낮은 데로 임해야 합니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계단 몇 개를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SSKK는 곤란합니다. 사유해야 살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SSKK, 즉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까라면 까라는대로 영혼없이 행동해선 곤란합니다.
그것은 기득권층이 강요하는 답정너에 불과합니다. 처음엔 정답이 잘 안보여도 열심히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며 온마음을 다해(勞心焦思) 약자들을 위한 맞춤형 정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형식성 뒤에 공무원들이 숨어서도 곤란합니다. 공무원들 자신의 인권이 소중한 것만큼 민원인의 인권도 소중합니다. 오죽하면 시간을 내어 민원인이 일부러 관공서로 찾아오거나, ARS 음만 몇 번이고 계속 반복해 들리는 전화통을 오래 붙잡고 있겠습니까.
그래도 마지막 보루인 나라살림꾼에게 매달려 보겠다는 그들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고통스런 심정을 공무원 자신의 편리만 생각해 저버려선 안됩니다.
물론 민원인의 폭언도 문제이며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 마련도 긴요합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간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건 시민(민원인)의 시간도, 그 간절한 처지도 같이 존중해야 합니다.
“인권 이전에 인격, 인성입니다.” 자유의 사회성, 즉 내 자유와 권리가 소중한 만큼 남의 것도 소중히 여겨야 비로소 내 것도 지켜집니다. 남을 존중해야 자신도 존중받는 법입니다.
대표시민답게 시민들의 입장에서, 특히 빽없고 가난하고 아픈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역지思지 역지感지 역지行지로 사회안전망과 통합돌봄체계를 굳건히 만들어내야,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웃고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과 자연의 갈등을 논하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작가인 샤토브리앙은 “문명 앞에 숲이 있지만 문명 뒤엔 사막만 남는다”고 19세기 중엽에 말했는데, 이 예언은 지금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참다 참다 못해 임계점을 넘은 자연의 대반격이 위험의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인간사회로 다가옵니다. 날로 기후파괴와 생태위기가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사막의 혹독한 자연조건을 알아서인지 아라비아 속담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포기하는 순간 핑계를 찾지만, 해결하려 마음먹는 순간 방법을 찾는다.”
우리도 기후파괴에 대한 더 이상의 합리화나 변명보다는 해결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미 발빠른 환경선진국들은 적극적으로 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개발의 시대를 청산하고 보전,복원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역(逆)간척 등 재(再)자연화를 도모하고, 녹색공정, 녹색기술, 녹색금융 등 생태적 전환을 체계적으로 시도합니다.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잠시 착각했던 인간의 생태학적 위상, 즉 생태계 보스의 허상에서 과감히 물러나 낮은 데로 임해야 합니다. 생태계 일원으로서 겸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생태계의 다른 일원들이 인정해 주는 진정한 생태계 멤버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기후위기는 인간의 지나친 첨가와 과도한 철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 위에 첨가나 철회를 덜 하면 됩니다. 그 길은 목수철학입니다.
좋은 목수는 목재의 귀함을 알기에 함부로 톱질하지 않습니다. “최소 측정 2번에 정확한 톱질 1번”을 가슴에 새기고 신중하게 톱질합니다.
시민들도 좀비형 소비자보다는 프로슈머(prosumer)가 되어야 합니다. 늘 적정량의 소비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직접 생산해내는 적정 생산자가 되어야 합니다. 도시텃밭을 하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그 한 방법입니다. 그럴 때 에너지 과소비가 줄어듭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구처럼 “짐승스런 편리를 부끄러워하고 사람다운 불편"을 감수해야, 우리 인간의 서식지이자 태생적 뿌리인 자연을 지킬 수 있습니다.
셋째, 인간 대 기계 혹은 인간 대 인공지능의 걀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2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어법에도 안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먼저 기업 생태계란 말이 그것입니다. 기업이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해 주변 요소들이 얽히고 설키며 기업에 여러 가지로 도움 되는 쪽으로 기업환경을 조성하자는 말의 취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러면 적지 않은 기업이 야밤에 몰래 버리는 산업폐수나 환경영향평가를 눈속임으로 하며 포크레인이나 불도저로 멀쩡한 자연을 함부로 밀어붙이는, 그런 기업들의 미친 개발과 환경파괴는 어찌합니까.
적지 않은 기업이야말로 생태계 파괴의 주범입니다. 생태발자국과 오존 가스를 줄이려는 기업들의 새로운 각성과 남다른 구체적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그제서야 기업생태계란 말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또 한가지 자율주행차란 말도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똑똑한 스마트폰 때문에 아주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기억 하지 못합니다. 저도 가끔 제 자동차번호가 가물가물합니다. 이젠 내비가 없으면 길도 못 찾아갑니다.
자율주행차? 덕분에 운전능력도 상실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로봇 운전기사로 인해 스스로 타율 바보가 되는 길은 극히 경계해야 합니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책이 있습니다. 가뜩이나 사장(死藏)되는 우리의 자율역량을 잊어버리면 절대 안됩니다. 조금 불편해야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사람과 기계의 경계를 잊어버리면 AI라는 단순 보완재가 우리의 대체재 자리를 차지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자리를 뺏고 우리의 뇌 속을, 우리가 응당 가야 할 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입니다. 보완재가 대체재일 순 없습니다. 보완재인 도구의 사용방향도 설익은 돈벌이나 경제수익 쪽보다는 공익과 공공선 쪽에 한정해 선용해야 합니다.
거대언어모델은 딥 러닝을 못하면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AI에 대한 과잉 의존은 자칫 자충수를 두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딥러닝 따위가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사회영역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공감능력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사람답게 사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못하는 게 있습니다. 공감능력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 드러난 마음을 서로 읽고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고통을 나누고 지향점을 서로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계에 지지 않고 모두 웃을 수 있습니다.
챗GPT에게 어디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냐고 물으면 인공지능은 세상 모든 곳의 정답으로 뉴욕을 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정답일 수 없습니다. 행여 거대언어모델 상의 정답이라 해도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은 그것과 너무 괴리가 큽니다. 몽상 속의 정답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 살고 있는 곳을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곳을 자주 걸어야 합니다.
지역 곳곳을 걸으며 탐구적 도시걷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만의 정답이 보입니다. 물질은 빈약해도 사람의 정이 있고 웃음이 있는 장소(place)를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걸음의 축적이 지역사랑-->지역참여-->지역발전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면 선조들의 평등산하 하무처(平等山河 何無處) 인식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고향과 현 거주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환경 조성론의 자율적 주체가 되어야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습니다.
AI의 포로가 되지 맙시다. 사람과 사회에 유용한 도구로 AI를 연착륙시킵시다.
지금까지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 파생될 갈등 요인들을 거칠게나마 3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 똑똑합니다. 갈등의 원인을 잘 헤아리면 해법도 사람답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해답을 찾아내야 하고 사람이기에 필히 해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단, 물질문명이라는 기존의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편리함만 추구하는 짐승처럼 될 수 있음을 경계하며 낮은 곳으로 임해 사람다운 불편을 감수할 때, 사람 대 자연, 인간 대 인간(부자 대 빈자), 인간 대 인공지능 간의 갈등은 점차 줄어들고 양자 간에 불이의 참뜻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불이가 갈등 해결의 핵심 열쇠말임을 재차 강조하며 긴 글을 맺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