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토리 텔러 (포토 에세이 블로그)
부자 본문
세상엔 부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많은 부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부자, 유머부자, 마음부자, 시간부자 등 부자의 유형도 다양합니다.
제겐 수중에 돈이 흘러넘치는 그런 돈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평생 검소하게 살아왔기에, 유한계급처럼 돈을 펑펑 쓰며 과시용 소비를 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투기나 주식관리 등 수익추구엔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것에 소비할 시간도 정말 아까워합니다.
돈을 더 모으려 아등바등하기보다는, 필요한 만큼만 저축해두었다가 의미 있는 곳에 돈을 요긴하게 썼으면 합니다.
‘돈은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런 속된 표현보다는 ‘돈 버는 것은 기술, 돈 쓰는 것은 예술’이란 말이 더 격(格)이 높은 말인 것 같습니다.
돈은 쌓아놓고 자랑하기보다는 의미있는 용처를 찾아내 잘 쓰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유머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큽니다.
몇 년 전 영화를 보다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 참 멋진 유머부자란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웰링턴 공작의 초상]이란 영화였습니다.
영화속 주인공은 가방끈은 짧지만 독학으로 세상물정을 이해하고, 희곡도 쓰고 수신료 거부 등 사회운동도 주도하며 마음 나눔을 실천하는 60대 장년의 한 영국 노동자입니다.
그는 다른 나라 화가들의 그림을 미술관에 소장하는 데는 수십만 파운드의 돈을 선뜻 쓰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약자들에게선 몇 푼 안 되는 tv 수신료를 뜯어내기 위해 혈안이 된 영국 정부의 실정(失政)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훔친 아들을 대신해 누명을 뒤집어쓰고 법정에서 무죄를 진술하는 영화 주인공의 자기변호 논리는 나름 ‘정의론’에 의거한 당당한 언사였습니다.
특히 자기변호 과정에서 유머를 섞어가며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진지하고도 신나게 주장하는 장면은, 정말 통쾌한 얘기가 아닐 수 없으며 이 영화의 백미에 해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근근히 일하며 먹고 살지만, 비록 낡았어도 항상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고 자기주장의 올바름에 유머를 듬뿍 가미하는 영화 주인공의 화법(話法)은, ‘영국 신사’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유머부자는 사람부자가 되기 쉽습니다. 유머와 위트를 섞으며 대화를 즐기는 사람 주변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깃들기 마련이죠.
유머가 섞인 재밌는 얘기로 좌중을 즐겁게 하며 주변에 긍정의 기운을 북돋는 사람부자의 선한 영향력은 얼마든지 수용할 만합니다. 그의 말에 같이 웃으며 잠시나마 세상의 시름도 잊고 마음의 여유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면, 이 풍진 세상을 함께 살아갈 친구가 많아지니 그만큼 세상살이가 덜 외롭고 힘도 더 얻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람부자가 되길 염원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들끓고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그런 사람부자가 되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지만, 경계해야 할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종종 인맥을 과도하게 이용해 사리와 사욕을 챙기느라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을 이용만 하려 들면 사람들은 금새 그를 떠나갑니다. 우정의 순수함이 변질됨을 눈치채기 때문이지요.
또 한가지 우려할 점은 사람부자라는 자기 착각 속에 과도하게 세(勢)를 형성하며 자기의 뜻을 관철하는 쪽으로 그 세를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이래라 저래라’ 권력을 행사하는 짓도 꼴불견입니다.
이처럼 사람부자에겐 명과 암이 있습니다. 암의 징후를 스스로 경계하며 선한 영향력을 베풀 줄 알아야 진정한 사람부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주위엔 드물지만 마음부자도 있습니다. 손에 쥔 것은 빈한해도 넓은 마음으로 남을 챙기고 마음으로 돕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마음부자는 마음의 키가 큰 사람입니다. 마음 폭이 넓고 마음속도 깊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마음부자는 ‘마음 거인’입니다.
나이가 먹으니 키가 점점 줄면서 한때 저는 ‘작은 거인’이 되어보자고 속으로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키는 줄지만 마음은 넓게 가져보자는 소박한 그러나 다소 무모한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후천적으로 작은 거인이 되는 것은 선천적으로 거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요즘 부쩍 듭니다.
마음부자되기가 한때 희망사항이었지만 참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갖고 끙끙대는 것도 희망고문인 듯하여, 작은 거인되기 프로젝트는 거의 포기 단계입니다.
‘실패에서 배운다’고 그 와중에 한가지 배운 점은, 남을 크게 돕거나 베풀지 못할 바엔 남의 손가락질이라도 당하며 살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돈과 권력, 명예에 눈이 먼 불나방 따윈 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자기 잇속 차리려고 남을 궁지에 몰며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법구경]을 보면, “녹은 쇠에서 나와 쇠를 먹어들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쇠를 먹어들어가는 녹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과욕과 집착과는 절연해야겠습니다.
눈 가린 원숭이, 귀 막은 원숭이, 입 다문 원숭이 등 원숭이 3형제가 생각납니다.
나이 들면 노안이 오고 귀가 먹고 말도 어눌해지는 필연적 이유를 늘 상기해야겠습니다. 말수는 줄이고 지갑은 종종 열어야겠습니다.
이제 정년을 맞아 직장생활에서 은퇴하니 시간부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아도 피할 수 없습니다. 바람쥐 쳇바퀴 돌듯하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니 갑자기 가처분 시간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시간부자는 잘못하면 부자 아닌만 못한 꼴이 되기 쉽습니다. 무한대로 주어진 시간홍수 속에서 끝없이 표류하는 부질없는 한 척의 조각배가 되기 쉽습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킬링타임 방법은 알아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경우,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칫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꼴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심심하고 외로우니 괜히 사람들 일에 관여하며 잔소리나 하고 ‘라뗀 말이야’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훈수나 두다가 꼰대란 말을 듣게 됩니다.
나이 들수록 무한대로 늘어난 가처분 시간을 쓸모있게 잘 활용하는 마음가짐과 지혜가 요구됩니다.
문득 조선시대의 시조시인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가 떠오릅니다. 윤선도는 좌절과 번민의 속세를 떠나 금쇄동 은거지에서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 등 자연의 다섯 친구를 벗삼아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갑자기 시간부자가 된 저도 오래 함께 할 친구가 긴요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몇년간 일상의 루틴으로 삼아온 몇몇 취미 활동을 마음속 반려친구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년퇴임을 해도 평생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니 독서는 필수이겠지요. 그래서 즐겨찾기해 놓은 몇몇 웹사이트에서 좋은 글 찾아 읽기, 도서관에서 2주에 책 3권 대출해 읽기, 계간지 [녹색평론] 정독하기는 저의 주요 일과가 되어야겠지요.
그 연장선 상에서 생태에세이 및 포토에세이를 써서 블로그에 종종 포스팅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저의 생(生)의 과제입니다.
중고생 때는 국,영,수를 잘해야 하지만, 나이 들면 ‘음,체,미’가 후반생에서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곰손이지만 줄곧 해온 기타 치며 좋아하는 노래 부르기, 주말 산행은 물론, 미술 초보도 접근 가능한 장르인 어반스케치 를 음체미 차원에서 지속해야겠군요. 최근 독학으로 시작한 오카리나 연주도 반려악기 마련 차원에서 계속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이외에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에 세계문화 비교 차원에서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즐거움도 놓칠 순 없지요. 가까운 나라 일본에 자주 여행가기 위해 최근 시작한 일본어회화 독학공부도 일상의 루틴으로 끌어들여 보겠습니다.
적어놓고 보니, 감히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에 빗대면, 제겐 팔우가(八友歌) 비슷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것들을 일상의 루틴으로 삼아 취미활동이 지속된다면 하루 24시간이 빠듯할 듯합니다.
단, 욕심을 내지 않고 즐기면서 하렵니다. 취미인데도 과욕을 부리면 반드시 뒤탈이 날 것입니다. 즐기면서 매일 하면 저의 팔우(八友)들이 도와줘서 하루하루 시간도 잘 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내 마음부자가 되지 못한 점은 저의 아킬레스건으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생각하고 베푸는 봉사의 기회를 적극 찾아보고 싶습니다. 곰손이지만 가끔 당근 케익을 만드니 그것을 만들어 주변과 나누는 기회도 종종 만들어봐야겠습니다.
직장 문을 나오니 선뜻 밀려드는 시간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 또 초로(初老)의 연약한 심리적 굴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